궁시렁거리기...^^

[스크랩] 보물로 가득한 잘 늙은 절 `완주 화암사`

또하심 2013. 12. 24. 00:04

 

 

 

 

정말 오래전부터 이곳 화암사를 가보고 싶었는데, 벼르고 벼르다 찾아본 완주 화암사...

설렘 가득 안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원래 화암사로 올라가는 산길이 무척 아름답고 쉽게 오르는 길이 아니었다.

요즘은 차가 들어갈 수 있게 구불구불하지만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나 있어서

나는 차로 쉽게 화암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 시간이 많았다면 처음 절을 지을 때 난 산길을 걸어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함이 못내 아쉽긴 했었다.

계곡을 여러 번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환상적인 길을 계속 만나게 되며,

벼랑 사이에 한 사람이 겨우 오를 정도의 아슬아슬한 길이 바위 끝으로 이어진다는 그 길을

언제고 시간이 된다면 그 산길을 꼭 거닐어 보고 싶다.

 

이곳 화암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국 목조건축의 전형인 하앙식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는 흔히 보이는 이 하앙식 건축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극락전의 발견은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찬바람이 불던 날 찾아가본 정말 깊고 깊은 산중에 꼭꼭 숨어있는 보물 같은 절 완주 화암사를 소개한다.

 

 

 

 

 

 

화암사에 얽힌 복수초 설화

 

옛날 임금님의 딸 연화 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세상 다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이 깊은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노라"라고 말하며 왕의 앞에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

잠시 잠에서 깨어난 임금님은 그 길로 부처님이 일러준 꽃을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고 마침내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 꽃은 불명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 연못이 아닌 바위에 핀 꽃이라 임금님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꽃을 먹게 하여 병이 깨끗이 나았고 임금님은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

 

지금은 을씨년스런 날씨가 이어지는 겨울인데...

이른 봄이면 이곳에 복수초가 많이 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 보면 막다른 곳에 건물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엔 절 같지 않고 마치 어느 문중의 재실이나 서원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아늑한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소박해 보이는 느낌이 정겹게 다가왔다.

 

 

 

 

이 절은 주변에 돌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어느 고택을 본 느낌 같았다.

 

 

 

담 너머로 한 컷 담아보고...

 

 

 

절 옆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 보니 비석이 하나 있었다.

 

 

 

 

화암사 중창비(전북 유형문화재 제94호)

이 비석은 조선 세종 때 다시 세운 화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선조 5년(1572)에 세웠다.

이 절은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머문 곳이기도 하여 절터 동쪽에는 원효가 도를 닦은 원암대가,

남쪽에는 의상이 도를 닦은 의상암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비문에는 조선 초기에 관리로 있던

성달생이 절을 세우고자 터를 찾다가, 신라 시대에 화암사가 있던 이 자리가 산 좋고 물이 맑아 적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세종 7년(1425) 이곳에 다시 화암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내문-

 

 

 

 

 

오솔길을 따라 올라오는 길이 보였다.

나는 차로 올라와서 저 길을 걸을 수 없었지만

돌계단마저도 아름답기만 했다.

 

 

 

 

화암사 앞에 이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그런지 더욱 긴장되었다.

화암사 입구에 서면 통나무 다리가 있었다.

우화루가 눈앞에 펼쳐지고 겉으로 보아도 절이 무척 오래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우화루... 이름 그대로 '꽃 비 내리는 누각'이라는 이름만큼

건물이 아름다웠다.

 

 

 

 

완주 화암사 우화루(보물 제662호)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화암사는 다른 절과 다른 점이 또 있었다.

보통 절에 가면 우화루처럼 누각이 절 입구에 있고

그 누각 밑을 통과해서 들어가는데

이곳은 누각 아래 돌담이 있었고

누각 아래로는 지나갈 수 없었으며 누각 옆으로 돌계단을 따라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화루 옆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정말 어느 고택 같은 네모진 작은 마당이 나타났다.

 

화암사는 전형적인 산지사찰이었다.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우화루 누각을 세우고 요사와 전각을 지어 ㅁ자형 작은 마당을 품고 있는 절이었다.

마당이라 보기엔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공간이라 해야겠다.

마당이 좁아서였던지 누각이 마당의 높이와 비슷하게 마루를 내어 마당 영역을 넓혔던 것 같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국보 316호)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下昻式) 건물의 유일한 예이다.

이 건물은 1981년 수리할 때 묵서명이 발견되어 조선 선조 38년(1605)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건물은 잡석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양식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칸 뒤쪽에 소박한 불단을 놓고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으며,

그 위에 닫집을 만들어 비룡을 조각하였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외부는 앙서형의

 쇠서를 새기고, 내부는 연화초를 새겼다. 공포 위에는 하앙이 경사로 얹혀져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하중으로 눌러주게 되어 있어 처마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격감시키게 하였다.

 하앙식 공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유구이므로 목조건축 구조 연구상 귀중한 유구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下昻式) 건물로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정말 감동으로 다가왔다.

 

 

 

 

화암사 동종(문화재청 자료 사진)

 

화암사 동종(전북 유형문화재 제40호)

 

이 동종은 극락전 안에 있으며 전체 높이 140㎝, 몸체 높이 85㎝, 입 지름 70㎝이다.
종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도드라지게 장식한 문양이 있다. 어깨에는 간략화된 꽃무늬 띠를 둘렀다.

어깨 아래로는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을 새겼다.

유곽은 길이 25㎝, 폭 25㎝이며, 덩굴무늬로 장식된 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유곽 밑에는 금철대시주(金鐵大施主), 동철대시주(銅鐵大施主), 보시(布施), 공양(供養) 등의 문자판이 새겨 있다.

-문화재청-

 

 

극락전 안에 보관된 동종은 볼 수 없었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만들었는데,

밤이면 저절로 종이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무기로 쓸 쇠붙이를 얻으려고 일본 헌병대가 몰려오자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들에게 미리 위험을 알렸고,

스님들이 종을 땅에 묻었다가 광복 후에 꺼냈기에 이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묵당도 자연 그대로 기둥이 살아있는 듯 보여 멋스러웠다.

이곳에선 어느 것 하나 놓치면 안 되는 소중한 문화재가 가득했다.

 

 

 

 

오랜 세월 버텨온 만큼... 그 세월 앞에

정말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었던 절이었다.

 

 

 

 

우화루 마룻바닥과 마당이 일직선 상으로 만들어

좁은 마당이 넓게 보였다.

 

 

 

 

응달진 우화루 지붕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면서 쏟아지고..

낙숫물 소리는 깊은 산중에 음악 소리처럼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우화루 내부를 담으면서 오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우화루 천장 모습..

 

 

 

화암사 우화루에 걸려있던 목어는

해탈한 선승의 분신을 보는 듯 어쩐지 마음이 닿는 오랜 세월의 고뇌 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무치는 아름다움이라고들 표현한다는데

세월에 삭은 목어 한 마리...바라보는 나도 그렇게 다가왔다...

그렇게 크지도 않고 화려한 단청도 바람결에 모두 사라지고

그 형태만 희미하게 남아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화암사 목어는 마곡사 목어와 함께 목어의 백미라 일컫는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어로는 선암사 목어와 마곡사 목어,

그리고 화암사 목어를 꼽는다고 한다.

 

 

 

 

 

 

극락전의 아름다운 처마는 하앙식...

 

여기서 하앙식 구조란 공포 위에 하앙이 경사로 얹혀져 외부에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내부에서는

지붕 하중으로 눌러주게 되어 있어 처마 하중이 공포에 주는 영향을 격감시키게 만든 건축 기법을 말한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나무로 끼워 맞추듯이 만들어진 처마를 보면서 감동하였다.

 

이 건축은 중국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 때문에 만들어진 기법이지만, 백제 건축의 전형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의 건축 기법이 대처의 흔한 큰 사찰에서는 단 한 채도 발견되지 않다가

이 산골짜기 산 중턱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니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겠는가?

 

절을 관리하고 계신 분이 친히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시는데 들으면서 감동하여 나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 어찌 그 오래전에 이렇게 나무만을 이용하여 이렇게 완벽하게 건물이 지어졌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나무 하나만 잘못 끼워도 우르르 무너졌을 것이란 설명은

중심 잡기 힘들었을 것이란 설명과 처마를 길게 뺀 그 공법이 정말 감동이었다.

 

 

 

 

 

 

 

위에 사진들을 보면 나무들이 밖으로 삐쳐 나온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같이 똑같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의 하중을 이겨내는 비결이라고 설명하셨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설명을 들었다.

 

 

 

 

화암사 절에 사용된 기둥을 보면 이렇게 나무 그대로 사용하면서

기둥을 바로잡기 위한 지혜를 설명해 주시는데 정말 대단하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있는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빛바랜 문살도,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듯 정겹게 보였고,

화암사에 있는 모두가 보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극락전 옆으로 보이던 뜰..

절 주변은 돌담으로 둘려 있었다.

 

 

 

 

 

 

화암사를 중창 불사하신 분을 기리는 사당 철영재

 

 

 

 

 

 

어느 해인가 극락전이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기둥 몇 개를 복원했다는데

이렇게 틈이 벌어져 망가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원했던 기둥은 위에 사진처럼 모두 틈이 벌어져 있었다.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처음 지을 때 사용했던 나무는 틈이 생기지 않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복원한 기둥은 저렇게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틈이 생겨 있었다.

설명해주시는 말씀도 그 이야기를 짚어주시면서

정말 이렇게 하는 복원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 하면서 공감했다.

이렇게 틈이 생긴 기둥이 과연 몇 년을 갈까?

몇백 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보고 뭘 느끼겠는가?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는 잘 보존하고

혹여 복원하더라도 빨리빨리 만들어 복원하는 것보다 천천히 하더라도 꼼꼼하게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위에 기둥은 처음 절을 지을 때 사용한 것인데

수백 년이 흘러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저 기둥을 쓰다듬게 되던 그 마음...

 

그런 마음이 들도록 제발 복원하게 되거든 대충하는 그런 행정은 사라져 주길 바란다.

 

 

 

 

 

정말 보물 같은 화암사를 돌아보며 감동 또 감동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정말 그동안 돌아본 어느 절보다도 의미가 깊고 아름다운 절이었다.

아쉽지만 나중에 나는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고 절을 내려가야 했다.

다음엔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다른 계절에 찾아와 오래 머물러 화암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슴 따뜻한 감동을 다시 맛보고 싶다.

 

 

 

 

산을 내려오면서 구불구불 올라왔던 길을 사진에 몇 컷 담아보았다.

화암사 가는 길은 정말 곡예를 하듯 돌아가는 곡선이 아름다운 길이 이어진다.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人間世(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 위 시는 화암사에 이르는 길 산길에 놓여있는 시다.

왠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 같아 마음에 닿는 시다.

 

 

 

 

 

 

 

화암사를 내려오다 보면 만나지는 요동마을 입구에 시무나무가 있었다.

나는 시무나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마을도 역시나 곶감이 많았다.

마을을 잠시 기웃거려보고..

해가 지면 집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여행 중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내일 여행을 위해

하룻밤을 이쪽에서 머물러야 했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자꾸만 화암사에서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밤을 보냈다.

정말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 하나' 만난 느낌을 느끼고 싶거든

완주 화암사를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출처 : 내 영혼이 아름다운 날들...
글쓴이 : 초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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