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시렁거리기...^^

카뮈의 마지막 날들

또하심 2012. 1. 12. 12:10

음...카뮈가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네

피를 토할만큼의 폐병쟁이였고..."죽음은 소리없이 엄습하고 피는 조용히 흐른다.(오텔로의 독백)"

 어릴때 이름이 베베르였고 축구를 좋아했고 골키퍼를 했고

가난해서 빈민가에서 살았고, 연극의 연출을 좋아했고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카뮈에게 극장을 맡기려고도했고,  영화배우로도 케스링되어 유명한 잔 모로가 승인까지 했으나 불행히? 장 폴 벨몬드로 바뀌고

이대작가가 느끼는 지식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늘 뭔가 용서받아야 할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이 대 석학의 자격지심???? 

아버지가 알제리 독립전쟁의 알제리 보병으로 참가 몇달만에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귀머거리였고..

알제리..하면 냉혹하고 무자비한 "용병"들이  떠오른다.

표정없이 냉혹 그자체인, 키가 좀 작지만 옛날 함프리 보카트가 열연하면 딱..일듯한

잉그릿 버그만과의 멋진 영화 카사브랑카의 배경도 알제리던가?

역시 카뮈의 언어? 글?들이 좋다. 철학자들의 언어를 뛰어넘는 철학의 뜻이 있다.

1957년 프랑스 최연소 노벨상을 받으나 그가 알제리에서 애송이시절? 21세에 공산당에 입당헸으나 뚜렷한 계급질서에 환멸,당시 프랑스는 공산주의자가 공공연히 활개를 치던 판이었고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자 좌파 우파 모두에게서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그의 탁월한 문학적 가치는 차치하고 정치적이었던 행위만으로 동료였던 사르트르(나중에 그는 뭔 이유에선지 노벨상을 거부한걸로 더 유명해지지만) 와도 결별하며 그자신이 "이방인"이 되었던게구나...사르트르도 공산당이었으면서....


이방인

저자
알베르 카뮈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03-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이방인!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
가격비교

 

 파리에서 상류의 생활을 하지만 세련된 상류사회의 이를테면 최고급의 레스트랑 식사라든지...등등 뭐 그런 것과는 어색하고 거리가 먼 카뮈. 47세의 나이에 친구와 자동차 여행중 차사고로 숨진다.

음, 그의 이방인을 다시 앍어봐야겠어

"그리고 함께 사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서로 닮은 동시에 서로 다른, 그러나 존중할 만한 두 민족은 가슴에 분노를 안고 함께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회교도인 아랍인들이 독립을 원하며 프랑스와의 끝없는 분쟁에 대해서...그의 표효다.

1956년 기 물레가 망데스 프랑스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자 실망한 카뮈는 자신의 외모적 컨셉?과 흡사한

"참묵"으로 숨을 결심을 한다.

"삶의 역경은 침묵의 기술을 가르쳐 준다.....세네카" 처럼

원천적인 침묵속에서(그의 어머니 아버지를 대신한 삼촌까지) 그바위같은 참묵속에 갇혔던 언어들이 말대신 그의 글로 분출되어 진걸꺼다.

"행동하는 것이 중요할때 과연 말이 필요할까?"...그의 독백!

거부하되 절대 포기하지 말것...마치 계속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만약 웃음이 절망의 재갈? 일 뿐이라면..." 우울과 고독한 그의 긴 얼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 처럼

혀가 잘리진 않았으나 스스로 침묵속에 침잔한 마치 트라피스트의 수도자들같은 침묵속의 카뮈

"절대로 혀가 할 수 없는 그 이상으로 파고드는 침묵의 표현이 있다"..보쉬에의 말이라며 카뮈가 인용

음..라라가 화려한 이름과는 달리 쥬피터의 분노로 혀가 짤려 지옥으로 내쫒긴 침묵의 여신이었네..

다니엘 샤프란의 첼로로 1번부터 6번까지 들으며...

 

 

이 저자의 최근작

이방인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저자분류
현대소설가
생몰년
1913년 11월 07일 ~ 1960년
출생지
아프리카 알제리
데뷔
1942년 '이방인'
저자소개
1913년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 였다. 농업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장애인 어머니와 가난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평생의 스승이 된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말로, 지드,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최초의 본격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집필 작업에 들어갔으나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경력
1928 ~ 1930 알제 대학 축구팀의 골기퍼
1933 ~ 반파쇼 운동에 가입
1934 ~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
1936 ~ 1937 알제 라디오 방송극단의 배우
1938 ~ 알제 레퓌블리캥지 기자
1939 ~ 잡지 '리바주' 창간
1941 ~ 파리 수아르지 편집 담당자
데뷔작
'이방인'
수상
노벨문학상
학력
알제대학교 철학과 학사
 
보쉬에

보쉬에 [Jacques-Bénigne Bossuet]프랑스 주교 | 브리태니커

보쉬에 요약정보

세부정보 확인
소속 국가 프랑스
죽은 곳 파리.
죽은 때 1704. 4. 12
직업 주교
태어난 곳 프랑스 디종
태어난 때 1627. 9. 25
1627. 9. 25 프랑스 디종~ 1704. 4. 12 파리.

프랑스의 주교.

개요

교황권에 맞서 프랑스 교회의 권리를 변호한 웅변적이고 영향력있는 인물로, 특히 유명인사들을 위한 조문(弔文)을 포함한 문학작품으로 유명하다(→ 색인 : 로마 가톨릭교).

초기생애와 사제직

장관을 여러 명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세까지 디종에서 살며 그곳에 있는 예수회대학에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0세 때 삭발례(削髮禮)를 했다. 1642년 파리로 유학하여 10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콜레주 드 나바르에서 정통적인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는 당시 많은 성직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제직 이상(理想)의 쇄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병원과 선교수도회를 많이 세운 성 파울루스 빈켄티우스의 간단명료한 웅변에 특히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과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파리에서 절대왕권에 대항하여 프롱드당이 결성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1652년 사제서품과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콜레주 드 나바르가 제의한 높은 직위를 거절하고, 메스에 정착해 아버지가 마련해놓은 성당 참사회원직을 맡았다. 1669년까지 메스의 성직자단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656~59년에는 메스와 파리를 오가며 일했고, 1660년 이후에는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메스에 있는 동안 성당 참사회원으로 열정을 다해 책임을 수행했으나 주로 설교와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논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처녀작 〈폴 페리의 교리문답을 반박함 Réfutation du catéchisme du sieur Paul Ferry〉은 메스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 목사 폴 페리와 벌인 논쟁의 산물이다. 보쉬에가 훌륭한 설교가라는 소문은 파리에까지 퍼졌으며, 그곳에서는 특히 〈사도 바울로에 대한 송사 Panégyrique de l'apôtre saint Paul〉(1657)과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지니는 숭고한 지위에 대한 설교 Sermon sur l'eminente dignité des pauvres dans l'Église〉(1659)가 탄복을 자아냈다.

사순절 설교와 조문

보쉬에는 그뒤 10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 대중 설교가로 큰 인기를 얻었다. 1660, 1661년 파리의 유명한 미님 수도회와 카르멜 수도회에서 사순절 설교를 했고, 1662년에는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그 앞에서 사순절 설교를 했다. 성서 인용과 그에 따른 해석으로 가득한 그의 사순절 설교는 바로크식 수사학의 전형이 되며, 바로크적 이상의 장엄함과 비장감을 드러내면서도 과장이나 틀에 박힌 수법은 보이지 않는다. 1669년 그는 소환을 받아 중요한 국가적 인물의 장례식에서 으레하던 조문을 낭독했다. 최초의 '장례식 연설'로는 영국 출신의 프랑스 왕후 앙리에타 마리아에 대한 조문(1669)과 마리아의 딸이자 루이 14세의 형수인 영국의 앙리에타 안에 대한 조문(1670)이다. 프랑스 고전 산문의 걸작인 이 조문들은 위엄과 균형을 보여주며, 주제를 서서히 발전시키면서 감정에 호소하되 논리적 짜임새가 있다. 설교가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신학박사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얀센주의(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고도의 원죄의식을 강조하고 구원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맡는 역할을 강조함) 논쟁에 참여했으며, 이 운동으로 일어난 분쟁에서 가능한 중립노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논쟁에 전념했다.

1669년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콩동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1670년 왕의 맏아들 도팽의 교사로 임명되자 주교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이 지위로 인해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새로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는 글 〈논쟁점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 해설 Exposition de la doctrine de l'église catholique sur les matièes de controverse〉(1671)을 출판했다. 그뒤로 설교는 가끔 했을 뿐이다. 그는 주로 종교 및 도덕 교훈에 관심이 있었지만, 라틴어·역사·철학·정치학도 가르쳤으며, 자신의 제자를 위해 신의 섭리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그는 정치를 다룬 주요저서 〈성서의 말씀에서 이끌어낸 정치술 Politique tirée des propres paroles de l'Écriture sainte〉(이 책은 왕권을 뒷받침하는 신적 권위의 증거로 성서를 사용함)을 써서 절대주의의 위대한 이론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는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고 그 정부의 권위는 신성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란은 어떤 것이든 범죄라는 이론이다(→ 색인 : 왕권신수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군주가 져야 할 두려운 책임도 강조했는데, 군주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행동하고, 좋은 아버지로서 신민들을 다스려야 하며, 자신의 권력을 믿고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1681년 그는 (Meaux)의 주교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 안 드 공자그 공주에 대한 조문(1685), 미셸 르 텔리에르 대법관에 대한 조문(1686), 대(大)콩데에 대한 조문(1687) 등 2번째로 장례식 조문 연작을 지었다. 그는 도팽이나 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본업은 궁정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헌신적인 주교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구민들과 보내며 설교하고, 자선단체들과 함께 부지런히 활동하며, 하급 성직자들을 감독했다. 갈리아주의·프로테스탄트주의·정적주의(Quietism) 등 당시의 신학논쟁들과 관련하여 몇 차례 교구 밖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갈리아주의 논쟁

갈리아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루이 14세는 공석중인 교구의 세금 징수와 그외 다른 문제들에서 프랑스 군주가 교황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교황지상주의자들은 교황이 최고의 권한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1681~82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 성직자 특별총회가 소집되었다. 보쉬에는 이 총회에서 개회설교를 했고, 〈4개 조항 선언 Dé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이라는 폐회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교회 통일에 대한 그의 유명한 개회설교와 함께 1682년 프랑스 성직자총회에서 낭독되었다. 이 조항들은 세속문제에서는 왕이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며, 신앙문제에서는 교황의 판단도 전체 교회의 동의 없이는 무류성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총회에 참석한 모든 성직자들은 이 선언문에 동의했으며, 이 논쟁에서 보쉬에가 맡았던 역할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그는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논쟁에도 참여했다. 그는 그들을 박해하는 것을 반대하고 지적인 주장으로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했지만, 1685년 왕이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것(이것은 사실상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를 금지하는 조치였음)을 지지했다. 1688년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변동사 Histoire des variations des églises protestantes〉를 출판했고, 그뒤를 이어 〈프로테스탄트에게 주는 조언 Avertissements aux protestants〉(1689~91)을 출판했다. 그는 독일의 대철학자 라이프니츠와 교파를 초월하여 편지를 주고받았다.

보쉬에는 갈리아주의 분쟁과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논쟁에서는 온건한 태도를 보였지만, 다른 경우에는 극장을 부도덕하다고 단죄하는 등 관용성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 캉브레의 대주교 프랑수아 페늘롱이 시행하던 정적주의라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앞장서서 공격했다. 그는 정적주의자들을 '새로운 신비주의자들'로 규정하고 이를 맹렬히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의 소명에 대한 교훈집 Instruction sur les états d' oraison〉(1697)·〈정적주의에 관한 보고서 Relation sur le quiétisme〉(1698)를 썼다. 여러 차례 소책자 논쟁을 벌이고 몇 가지 불쾌한 음모를 꾸민 후 보쉬에는 1699년 페늘롱을 로마에서 단죄받게 했다.

평가

그가 죽은 뒤 여러 세기 동안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다만 그의 문체와 연설이 뛰어나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민족주의자들과 군주론자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경멸한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그는 프랑스 가톨릭 사상의 대가로 인정받는 경우도 많지만 교황지상주의자들, 가톨릭 진보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페늘롱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한다. 보쉬에는 교리의 불변성과 교회의 완전성을 강조했는데, 이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구시대의 사상가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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