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시렁거리기...^^

[스크랩] 굶주림의 예술, 그 강박감의 정체

또하심 2010. 3. 5. 20:31

 

 "내가 볼 때 중요한 것은 굶주림을 방치하는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문화라는 것으로부터 굶주림의 힘과 동일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는 그런 문화가 중요하다." - 앙토냉 아르토

 

지금까지 읽어본, 만나본, 들어본, 향수한 모든 예술(아마츄어든 프로든)의 궁극은 유토피아의 의지였다,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요즘은 주로 미시적이면서 이면적인 우회로 말한다는 차이일 뿐. 그런 잠정적인 결론(가설)을 내리고 싶다. 비록 그것이 그 예술이 속한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는 낙인이 찍혔을지라도(지독히 불온한 예술일지라도). 무라카미 하루키나 신경숙은 그의 조국에서 작가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얻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쉬지않고 쓴다.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미친듯이 써댔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에 몰려 이국을 떠돌면서도 쉬임없이 쓰고 또 썼다. 그들로 하여금 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글쓰기의 관성인가? 죽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글을 쓰게 밀어대는 여러 동인 중 하나, 그들은 세계가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한계(능력) 안에서 살만한 곳으로 붓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은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의지로 말이다. 가끔은 세상의 모든 책이 <세상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 라는 사회서적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신적으로 배고픈 자가 육체적으로 배고픈 자를 방치하거나 유기하는 공식의 선후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19세의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본다.(이 편지는 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열린책들, 2007)에서 발췌했다.) 오스터가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 속에는 세상에 수많은 책 가운데 우리를 물렁물렁하게 만드는 책이 아니라 "재앙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 우리를 크게 슬프게 만드는 책,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책,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혼자 숲 속으로 추방된 느낌을 주는 책, 자살 같은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 같은 책" 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생각은 바로 오스터 자신의 생각이다. 폴 오스터는 그것을 굶기의 예술 혹은 굶주림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예술은 굶기 혹은 굶주림과 닿아 있는가?  그것은 예술 행위가 갖고 있는 두 개의 극단에서 찾을 수 있겠다. 굶주림(결핍)과 에너지(충만). 삶은 중도적일 수 있지만 예술은 중도적일 수 없다. 삶과 죽음이라는 낙차를 동시에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표현된 것이 중도적일 지라도 그것을 표현한 자는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에 중도적일 수 없다. 그 말은 생을 건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 행위는 위험한 일이자 엄청난 에너지를 포함하는 일이다. 그럼 왜 그렇게 위험한 일에 자신을 바치는가? 그것은 상대적인 세계에서 절대적인 순간을 만나고 싶어하는 강박증에 닿아 있고, 끊을 수 없는 아편과도 같은 욕망의 적자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벽한 순간을 맞보고 싶은 -유토피아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의지가 예술이라는 가상의 세계속에 전 생을 걸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멋진 책상에 앉았어. 너는 그걸 모를 거야. 네가 어떻게 알겠니? 사람을 교육시킨다는 멋진 목적을 가진 책상이지. 작가의 무릎이 들어가는 곳에 두 개의 무시무시한 나무 대못이 있어. 자 잘 들어 봐. 만약 조심하면서 조용히 앉아서 멋진 글을 쓰면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흥분을 하게되면- 가령 몸이 약간만이라도 흔들리면 어김없이 그 대못이 무릎을 찔러.아 정말 아프지. 퍼렇게 멍든 자국을 너에게 보여 줄수 있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려는지 분명해. <흥분 시키는 것은 쓰지 마라. 글을 쓰는 동안 몸을 떨지 마라>...우리를 상처주고 찌르는 책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타격으로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그걸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겠어?......우리는 이런 책을 필요로 해. 재앙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 우리를 크게 슬프게 만드는 책,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책,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혼자 숲 속을고 추방된 느낌을 주는 책, 자살 같은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 같은 책, 이게 나의 믿음이야.

 

                                                                                                                                   -pp. 146~147 <카프카의 편지들>에서

 

 
 

 

 

 

 

 

 

폴 오스터는 <뉴욕 통신>(열린책들, 2007)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 삶의 회로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굶주림의 예술>에서 자기 파괴적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크누트 함순의 장편 <굶주림>에 주목, 예술의 본래적 의미를 살핀 것이다.(<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이란 제목으로  이미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예술이란 행위 속에 내재된 위험이다. 예술을 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식은 그 본질상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또 확실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단식은 점진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 결실이나 파괴에는 도달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이란 행위 속에 내재된 위험이다. 예술을 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p. 21 〈굶주림의 예술〉(열린책들, 2007)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내버린다. 그들은 살 수 없을 때까지 살고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죽음은 최후의 벽이다. ……사람은 저마다 그 벽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사람은 등을 돌리다가 결국은 등 뒤의 칼을 맞는다. 어떤 사람은 그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져서 공포 속에 주위를 더듬으며 평생을 보낸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것을 바라보면서 비록 마음속에 공포는 있지만 그것을 대면해야 한다고 자신을 가르치면서 크게 눈을 뜬 채 인생을 살아 나간다. 모든 행동, 심지어 맨 마지막의 행동까지도 중요하다.

 

 - pp. 87 ~88 〈월터 롤리 경의 죽음〉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묻지 않는다. 아들의 죽음은 부모에게 가장 궁극적인 고통이다. 비록 크게 기대하지 않지만 우리가 인생에 기대한 모든 것을 산산조각내 버리는 잔인한 공격이다. 아들을 잃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하고 오로지 심연만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장시를 써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 작업은 아나톨과 함께 죽어 버리고 말았다. 비록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기록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 pp. 252 〈말라르메의 아들〉에서

 

나는 노트르담을 지나칠 때마다 신문에 났던 그 사진을 떠올렸다. 대성당의 엄청나게 큰 탑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걸쳐져 있는 것 같았고, 마치 공중에 마법처럼 매달린 존재, 저 자그마한 인간, 광대무변한 하늘의 좁쌀 하나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대성당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상상된 광경을 추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래전 하느님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 지어진 이 유서 깊은 파리의 기념비가 뭔가 다른 존재로 둔갑해 버린 듯했다. …… 구체적 흔적이 남아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마음속에 그 흔적을 만들었고 그건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심리적 증거는 이제 지워 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파리에 대한 나의 인상이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파리를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 p. 255 〈고공 줄타기〉에서

 

줄타기의 매력은 그 철저한 무용성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어떤 예술도 줄타기처럼 강력하게 우리 내부의 미학적 충동을 불 지르지 못한다. 우리는 공중에 올라간 줄꾼을 쳐다볼 때마다, 우리 내부의 일부가 그와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다른 예술 분야의 연기와는 다르게, 고공 줄타기의 체험은 직접적이고,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순하므로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다. 줄타기 자체가 곧 예술이고 가장 선명한 윤곽을 가진 생의 모습이다.

- p. 257 〈고공 줄타기〉에서

 

나는 당시 아주 가난했고, 그냥 앉아서 막연히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돈이 있어야 먹을거리를 사오고 집세를 낼 수가 있었다. 나는 그 후 몇 주 동안 매일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번역료 지급을 요구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바닥이었던 순간이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나는 출판사에서 했던 나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빈털터리였고, 번역을 해다 주었으니 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쪼들리고 있었는지 증명하기 위해 이런 얘기 하나만 해도 충분하리라.

 

- p. 268 〈과야키 인디언의 연대기〉에서

 

그렇게 별채의 계단에 서서 나는 정말 천재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눈을 들어 보니 두 살배기 딸이 집 앞에 있는 게 보였습니다. 딸애는 발가벗고 있었는데(여름이라 늘 그런 식으로 지냈습니다) 그 순간 돌 더미 위에 쪼그려 앉더니 똥을 누기 시작했습니다. 딸애는 나를 보더니 아주 행복한 목소리로 외쳤어요. 〈아빠, 나 좀 봐! 내가 해놓은 걸 좀 봐!〉 그래서 나 자신의 천재성을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딸애의 똥을 치워야 했습니다. 그게 내가 책을 끝내고 한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일동 웃음]. 30초간 영광을 누리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 p. 311 〈래리 매캐퍼리와 신다 그레고리와의 인터뷰〉에서

 

고독은 나에게 다소 복잡한 용어입니다. 그건 외로움 혹은 고립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을 다소 어두운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이 말에 부정적 함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건 인간 생존의 한 조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혼자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진짜 생활은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개처럼 본능이나 습관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두 군데의 장소에서 존재합니다.

 

- p. 318 〈래리 매캐퍼리와 신다 그레고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야기가 영혼을 위한 기본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글쓰기가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작품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알아내려는 노력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황량함을 느끼는 순간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쓰고 있는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는 순간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이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 p. 340 〈마크 어윈과의 인터뷰〉에서

 

<뉴욕통신>은 제1부 에세이 Essays 에서는 굶주림의 예술 *여정 *카프카를 위한 만가 *뉴욕의 바벨탑 *결정적 순간 *다다의 유골 *진실, 아름다움, 침묵 *월터 롤리 경의 죽음 *과자, 샌드위치, 빵 껍질 그리고 돌 *추방의 시 *관념과 사물 *죽은 자들을 위한 책 *개인의 나, 공인의 눈 *순수와 기억 *부활 *카프카의 편지들 *미국의 아들 *섭리 *바틀부스의 어리석은 소행들, 제2부 서문 모음 Prefaces 자크 뒤팽 *앙드레 뒤 부셰 *하얀 바탕 위의 검정 *북부의 빛 *20세기 프랑스 시 *말라르메의 아들 *고공 줄타기 *과야키 인디언의 연대기 제3부 인터뷰 Interviews 번역 *조지프 말리아와의 인터뷰 *래리 매캐퍼리와 신다 그레고리와의 인터뷰 *마크 어윈과의 인터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폴 오스터는 이 산문집을 통해 뫼비우스의 띠처럼 20세기 문학의 바깥과 안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순환의 모습을 정교한 해석과 대담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그의 날카로운 지성은 때로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서술로, 때로는 사실에 대한 정치한 묘사로 철학적 응시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세기말의 뱃머리에서 뒤돌아본 20세기 문학의 육지는 그렇게 하여 독자들의 사색 속으로 몰입된다.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이정표를 세웠던 작가들을 논하는 <굶기의 예술>은 그들의 문학(예술)을 태동시킨 강박감의 정체를 은밀하게 추적한다. 우리의 문학에, 또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이러한 강박감이 "재앙과도 같은 상처처럼, 먼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다는 것을, 오스터는 알고 있다.

 

 달은 많은 의미를 한꺼번에 갖고 있는 일종의 시금석입니다. 신화에서는 <밝은 다이애나>로 나오는데,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밝히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상상, 사랑, 광기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의 천체로서 하늘에서 맴도는 생명력 없는 돌 같은 물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 즉 초월을 바라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역사, 특히 미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먼저 콜럼버스가 있었고, 서부의 발견이 이었고, 마지막 변경으로서의 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자신이 미국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도와 중국으로 항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달의 궁전>은 그런 오해의 형상화, 미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달은 반복, 인간 체험의 순환성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결국 각각의 이야기는 같은 것입니다. 각각의 세대는 앞선 세대의 실수를 되풀이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 폴 오스터

 

 

 

 

 

 

 

출처 : 데자뷰(deja vu) & 자메뷰(jamais vu)
글쓴이 : 칼리오페Calliop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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