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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러관련도서 그리고 상념.

또하심 2006. 11. 21. 21:35

 

 

 

  콘스탄틴 플로로스의 저서의 일본어 번역.^^ 햐~~~ 부럽다. 2005년 6월에 발매된 책이다.

 

 일본 후지와라 서점에서 발해한 것이다. 번역은 공역인 듯. 2사람이 같이 번역했다. 한번 구입을

 

 고려해야 겠다.(책값이 이지아마존으로 구입하면 한 9만원돈이 들어간다...물론 영어책은 3만원

 

 안팍이지만, 사놓고 장식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바도의 라이센스 녹음내지에도 이 사람의 해설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다. 반드시 읽어볼

 

 일이다. 말러리안이라고 자칭하려면 이 책은 무조건 독파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 책이 언제나

 

 번역될라나...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도널드 미첼과 블라우코프의 저서들도 반드시 읽어봐야

 

 하며, 알마 말러의 기록도 읽어두어야 한다. 말러는 진짜 공부할 게 많은 작곡가다. 지적인 스노비

 

 즘이나 카펠뮤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말러음악의 매력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

 

 이다. 알면 알수록 이 작곡가는 흥미의 대상이다.

 

 

 

 사실 말러는 60년대까지만 해도...무시의 대상이었다. 연주레파토리로 보편화 되기에는 그의

 

음악은 난해했고, 특히 보수적인 유럽청중들은 그를 바그너의 아류로 인식했다.(브루크너 역시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았다.) 아무도 지금처럼 말러와 브루크너가 교향악단의 주 레파토리로

 

확대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나치통치 시기에 매장되다시피한 말러는 더욱 그랬

 

고, 발터 클렘페러 호렌슈타인등등 멩엘베르흐를 제외하면..말러는 독일어권에서도 지지자가

 

많지 않았다. 말러를 지금처럼 스타 작곡가로 만들어준 것은 레너드 번스타인과 클라우디오 아바

 

도의 헌신적인 노력때문이었다. 미국이 말러를 키워준 것이다. 그는 누구의 말대로 미래의 동시대

 

인으로 우리 앞에 섰고, 우리는 그의 주옥같은 교향곡과 가곡작품들을 아주 쉽게 음반으로 들을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말러의 교향

 

곡을 기피했던 독일 작곡가들도 "가곡 작곡가"로서의 말러에는 깊이 심취하고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이겐 요훔이나 칼 뵘이나 루돌프 켐페등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말러음악을 도이취

 

음악의 한 지류로 보느냐 아니면 다른 독자적 교향악 어법으로 봐야 하느냐 하는 선결문제가 있

 

지만... 난 개인적으로 말러음악을 독일교향악사의 한 지류로 넣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는 드보르

 

작이나 짜이꼽스끼 또는 쇼스타코비치 시벨리우스같은 비독일어권의 교향악 작곡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말러음악에는 독일적 성격이 있지만, 말러 음악은 독일음악의 지류가 아

 

닌 말러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이 담긴 음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말러의 교향악적

 

이념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지휘자들이 말러의 독일어가곡에 깊이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보기

 

에는 언어적 접근의 수월성이라는 측면이 강했고 또 이해하기가 교향악작품들보다는 수월했기 때

 

문에 많이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러의 음악은 우리에게 신앙의 회복을 역설하는 "확신의 음악"이며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들에게

 

내려주는 안정감 있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다. 그의 불안과 어두움은 일시적인 것이며, 천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정화의식 같은 것이다. 그에게는 신과 자연의 낙관적 미래에 대한 확신이 존재하

 

며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건강한 것이다. 세기말적 불안감같은 것을 그에게 덮어 씌우는 것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난 그의 2번 교향곡과 8번 교향곡이 그의 정신세계의 하나의 안식처였고

 

6번과 9번 그리고 "대지의 노래"가 보여주는 섬뜩한 자기파탄적 의식은 바로 신앙의 입장에서 바라

 

본 일시적 "비관주의"라고 생각한다. 즉 그에게는 "기독교적 구원의 빛으로 쬐어지는 어둡고 심리

 

적으로 괴로운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즉 9번은 세상의 괴로움을 떠나서 미래에 다가올 "계시적"

 

구원을 노래하는 신앙적 체념이지..절대로 어둡고 답답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표현한 것이 아니

 

라고 난 생각한다. 마치 3번의 6악장의 괴로움을 통한 기가막힌 사랑의 카타르시스가 등장하는 것

 

처럼 난 그가 여호와의 구원을 얻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난 그를 비기독교적으로 유대적으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아니 참을 수가 없다. 그는 나의 의식속에서 안정된 신앙의 회복을 노래하는 다윗왕이

 

어야 한다. 이택후의 표현대로 하자면, 낙감문화의 정수라고 할까? 비관주의보다는 다가올 새로운

 

하늘의 구원을 소망하는 예언자의 모습이 말러음악을 들으면 떠오른다.

 

 

 

 사족-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말러의 가곡전부를 녹음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만을  말러녹음의 전부로 남겼다.

 

 

 

출처 : 음악과 문화를 사랑하는 이만이
글쓴이 : mahleri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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