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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오페라

또하심 2006. 8. 11. 17:26
ALIGN: justify">"순진한 공주병 환자인가, 냉소적인 코미디언인가"
"사상 최악의 소프라노"

플로렌스 젠킨스의 음반이 "드디어" CD로 나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플로렌스 젠킨스는 클래식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특이한" 성악가.
사실 특이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떨리며 음정도 맞지 않으며 박자를 놓치는 일도 예사다.

오죽하면 영국의 클래식음반 전문지 "클래식 CD"에서 "푸들이 낑낑거리는 소리"라고 평했다.

BMG레이블로 전세계에 출반된 이 CD는 35년 미국 RCA빅터에서 만든 SP음반을 재생한 것.

수록곡은 모차르트 아리아 "마술피리중 밤의 여왕" 요한 스트라우스2세 "박쥐" 리아도프 "음악이 나오는 담배갑"과 구노 "파우스트 패러디" 가운데 "보석의 노래" "정결한 집" 등 12곡이다.

그의 명성은 음반 첫 곡에서부터 확인할수 있다.
조수미의 노래로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아리아 "밤의 여왕"(오페라 "마술 피리" 수록곡)을 젠킨스는 첫머리부터 박자를 놓치고 들어간다.
그 이후는 측은함마저 느끼게 하는 고군분투 그 자체.

그녀는 1900년대초 태어나 30년~4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녀의 재능(?)이 꽃핀 것은 이혼 뒤.
음악을 공부하러 뉴욕으로 가 공연기획자인 두번째 남편 프랭크 젠킨스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수차례 연주회를 열어 인기를 얻은 그는 30년대말 "꿈의 무대" 카네기홀에 선다.
독주회표는 6주전에 매진됐고 카네기홀은 6,000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녀의는 무대매너도 뛰어났다.
연주복을 직접 디자인했으며 금은색의 자수와 천사날개 장식을 특히 좋아했다.

비제의 "카르멘"을 부를 때는 숄을 걸치고 빨간 장미를 객석에 던졌다고 한다.

43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는 음정이 예전보다 더 높이 올라갔을 만큼 (하이F) 행운도 따랐다.

이번 CD가 만들어진데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음반판권을 가진 BMG는 기존 SP의 길이가 너무 짧아(약 30분) CD 제작을 미루고 있다가 마침 개인음반 제작을 의뢰한 한 부부(토머스 번즈, 제니 윌리암스)가 젠킨스에 버금가는 "음치"라는데 착안해 이들의 노래를 덧붙여 CD를 만들었다.

음반 뒤쪽의 "파우스트 패러디" 4곡은 이들의 노래다.

국내에는 클래식 FM방송을 통해 간간이 소개됐으며 한국BMG가 2월 중순 1,000장을 내놨다.
한국BMG 클래식파트의 이일호씨는 "음치의 음반은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코믹한 측면과 희소성이 잘 부각되면 판매고 2만장까지도 기대한다"고 밝혔다. <: justify">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여성 가수가 등장했으며, 이들을 부르는 애칭은 가지가지였다. '노래의 여왕',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디바', '투스카나의 공격', '모조(模造) 레나타' 등. 그러나 여기, 이제 말할 우리의 스타,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를 묘사할 단어는 '비교를 거부하는'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갖가지 묘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를 듣고 나면 낱말은 딸리게 마련이고, 사전은 그 기술력(記述力)을 잃고 말았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성도 계관 시인들도 그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어 어느 일갈(一喝)도 내뱉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힘이, 어떤 괴이한 힘을 소유하고 있기에, 많은 문장가를 절망의 모퉁이로 몰아간 것일까?
젠킨스의 커리어는 수십 년에 걸쳐 있다. 그의 카네기 홀 연주회는 눈 깜짝할 새 매진되었으며, 레코딩은 수요를 따라갈 만큼 빨리 만들 수 없을 정도였다. 음악적 상류 사회 인사들로 가득했던 젠킨스의 뉴욕과 뉴포트의 리사이틀은 거의 모든 주요 신문에 리뷰가 되었으며, 그의 순수 팬들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의 군중들 수를 능가했다. 이런 광적인 찬사는, 우리에게 공기가 그러하듯, 그녀에게 무척 자연스런 것이었다. 여느 위대한 디바와 마찬가지로, 젠킨스 또한 그 와중에 곁을 소용돌이치며 그를 시대의 '전설'로 만들어 버린 많은 루머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제로 매니저이자 대리인인 클레어 베이필드와 함께 결혼이라는 이름의 속박에서 벗어나 36년간을 살았으며, 이후 형식상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자유' 세대에 속했던 인물이다. 젠킨스 연주회의 수익금은 예술가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더는 데 쓰이곤 했다. 즉 그녀는 예술 후원자로서 활약도 하였으며, 그 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베르디 클럽'이라는 극장을 열었는데, 카루소도 그 회원이었다.
젠킨스를 험담하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들은 "그는 음표 빼고는 모든 것을 부를 줄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불량배'(젠킨스는 그들을 간단히 이렇게 불렀다)들도 그의 성공을 거듭 지켜보면서 서서히 그에게 끌린 점 또한 사실이다. 젠킨스는 항상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를 때는 보석이 박히고 가슴이 깊숙이 파인 옷, 머리 장식관과 함께 푸른 수자를 입는가 하면, 갑자기 장신구들이 주렁주렁 달린 능라(綾羅)의 슬라브 가운을 갈아입고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을 부르곤 했다.
젠킨스는 그의 전속 피아니스트 코즘 맥문(Cosme McMoon)이 작곡한 곡조에 직접 가사를 붙여 화제가 되었는데, 아주 적절한 내용 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처럼 노래해, 새처럼(Like a Bird I Am Singing, Like a Bird)." 이 곡은 언제나 콘서트의 앙코르용으로 준비되었고, 이 음반에도 수록되어 있다. 오페라의 역작들 가운데 잘 알려진 아리아도 그에게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그는 체르비네타의 아리아(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2막의 아리아로 소프라노에게는 어렵기가 '밤의 여왕의 아리아'만큼 잔혹한 곡)나 '라크메' 중 콜로라투라 아리아 '종의 노래'도 레하르를 부르는 것처럼 목에서부터 가볍게 뽑아내었다.
이처럼 그녀가 못 부르는 노래는 없었으며, 안 부른 노래 또한 없었다고 전해진다. 젠킨스 버전 이후 같은 식으로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다. 삶에 대한 열정과 철저한 확신, 노래에 대한 사랑은 오를레앙의 문 앞에 서 있던 잔 다르크 만큼 고무된 것이었다. 테크닉은 흠잡을 데가 많고, 목소리 또한 강철 같은 닐손, 벨벳 같은 프라이스, 금과 같은 리자네크와 비교하면 고장난 악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서덜랜드를 큰 덩치 때문에, 칼라스를 고음의 불쾌한 떨림 때문에, 카바예를 악명 높은 연주회 취소 때문에 매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젠킨스를 약점 몇 가지로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약점들은 그를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으며, 젠킨스 자체를 예술로 남게 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시대를 앞장섰던 많은 개성파들과 같이 젠킨스의 음악적 소양은 부모와 첫 번째 남편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 1902년 프랭크 손톤 젠킨스와의 이혼 뒤에야 젠킨스는 펜실베이니아의 정적인 삶의 영역을 벗어나 음악적인 모험으로 가득 한 도시 뉴욕으로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유능한 법률가이자 펜실베이니아 입법부 의원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재산이 그에게 물려지면서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존재는 눈에 띠는 풍채를 드러냈다. 유터프 클럽(Euterpe Club)의 사회자-이런 식으로 불리기 싫어했을지 모르지만-가 된 것이다. 그녀는 직접 회원들의 가장 있기 있는 프로그램, "영감에 찬 천사, Angel of Inspiration"을 비롯하여, 클럽의 눈부신 '살아 있는 그림(tableaux vivants)'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저기서 숨을 헐떡이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젠킨스는 금, 은 등의 금속실을 짜 넣은 은빛 의상과 물고기 비늘 같은 모양의 날개를 달고 등장하여 청중들을 매우 즐겁게 해주었는데, 더욱 기상천외한 것은 이 장면이 누에고치 알이 열리면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출의 최면적인 효과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전쟁 통에 젠킨스의 복장이 제대로 공급이 되지 못하여 공연이 중단되는 날이면, 그를 보러 왔던 수많은 팬들은 비탄에까지 잠겼다. 어쨌든 젠킨스와 그의 공연은 클럽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 공연을 본 어느 명망 있던 부인으로부터 클럽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내기도 했다. 젠킨스는 앞서 말한 베르디 클럽, 일렉트릭 클럽, 루빈슈타인, 모차르트 클럽의 사회자로도 활동했으며, 이밖에 '뉴잉글랜드 여성 협회', '국제 애국 여성 연합' 등 박애주의적인 사회활동도 펼쳤다. 때문에 오페라 하우스에 설 시간이 없었다는 그녀 자신의 항변을 인정할 만도 하다. 그 대신, 그가 택한 차선책은 리사이틀이었다. 그는 리츠 칼튼 호텔의 그랜드볼룸을 빌려 매년 연주회를 가졌다. 이것 역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신문의 리뷰에 의하면 '린드버그를 기다리는 파리의 시민들처럼' 많은 이들이 숨을 죽이고 공연을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날 팝 가수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꽥꽥 비명을 질러 대는 충실한 팬들이 볼룸을 가득 메웠으며, 군침 도는 레퍼토리로 장식된 프로그램을 게걸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지속된 연구와 노력으로 매년 새로운 레퍼토리가 더해졌다. 이 '콜로라투라의 여왕'이 어떤 새로운 것을 선사할 지 프로그램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공연에서 불린 노래들은 모차르트의 '알렐루야'에서부터 브람스의 '헛된 세레나데', 다비드의 '브라질의 진주', 베르디의 '아 그인가, 꽃에서 꽃으로'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장르였다. 브람스의 가곡 '5월 밤'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노래하는 그대여, 꿈꿀 수 없다면 이 노래를 불리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오." 젠킨스는 프로이트도 연구해 봄직한 난폭한 열정으로 이 곡을 '꿈꿨다.' 젠킨스의 무대 매너는 냉정함과 함께 프로답지 않은 어수룩함도 배어있었다. 그의 '법적 남편'(베이필드)에 의하면 : "그는 완벽한 리듬감과 스타성이 있으며, 그것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독특한 미감을 발휘한다." 젠킨스의 '흉내 낼 수 없는' 노래와 전염력이 강한 즐거움은 '마술'로 표현되었다.
뉴욕 월드 트리뷴誌는 '최고의 리사이틀'이란 헤드라인 아래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거기서 엑스타시와 원기 왕성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청자들은 이끌린다"고 연주회를 평가한다. 1944년 이 신문은 또 한 번 최고의 찬사성 기사를 냈다 : "이 시대 대중 앞에선 모든 가수들 가운데, 원래의 음표를 4분의 1음 낮추거나 높임으로써 고정된 프레이즈에 즉흥성을 부여하고 강한 풍미를 덧붙여 노래 예술을 완성시킨 이는 오직 젠킨스뿐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이 예술가의 공적을 테크닉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일 수 있다." 젠킨스의 천재적인 솜씨와 지구력을 입증하는 '공적'이 여기 있다. 그는 노래 자체였으며, 확실한 디바이다. 그 같은 디바는 젠킨스 이전에, 아마 이후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해석을 들려주고 난 다음, 듣는 이로 하여금 그가 들은 믿지 못할 예술성에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여신'으로서.

<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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