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쟈코뱅 클럽에 들어가다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788년 9월 오손 연대에 배치되어 이듬해 9월까지 복무할 때 혁명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다독했으며 볼테르와 루소의 저작을 읽고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가 혁명과 직접 마주한 것은 지방에서 식량부족으로 봉기한 군중을 진압할 때였다.
1789년 8월 오손 연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혁명을 틈타 귀족 출신 장교들이 망명했는데 혁명 기간 중 포병부대에서는 3분의 1이, 보병부대에서는 3분의 2가 망명했다.
보병보다는 포병이 전투에서 더욱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망명자가 보병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이야말로 조국 코르시카에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1791년 4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토론회로 출발한 쟈코뱅 클럽에 들어갔고 곧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9월 코르시카를 방문하고 코르시카의 정치문제에 대해 쟈코뱅 정책을 지지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파올리는 코르시카를 영국령이 되게 하려고 했는데 쟈코뱅이 그의 계획에 반대했다.
파올리는 자신이 코르시카의 최고 행정 책임자에 임명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하며 프랑스 정부가 재정적으로 지원할 때만 코르시카가 프랑스 일부가 되는 데 찬성하겠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보고 자신이 영웅으로 존경했던 그와 결별하면서 파올리가 1792년 4월 아작시오의 선거에 출마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선거는 파올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1792년 1월 나폴레옹은 정규군에서 코르시카 의용군 대대 부관으로 전출되었다.
파올리는 왕당파와 성직권 지지파의 편을 들고 있었으므로 입지가 약화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정적들을 납치함으로써 의용군 대장에 피선될 수 있었다.
1792년 부활절, 종교적 분열로 아작시오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나폴레옹 대대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가 파리로 온 것은 파올리가 선거에서 승리한 다음 달이었고 9월 중순까지 파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프랑스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침략했으며 9월 학살이 발생했다.
나폴레옹은 8월 10일 시민들이 튈르리 궁을 습격해 친위대 6백여 명을 죽이고 루이 16세와 왕족을 감금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인에 대해 냉소하면서도 혁명의 이념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
그는 혁명을 통해 프랑스가 세계를 자유로 인도할 것이며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이 곧 코르시카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궁시렁거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지방 (0) | 2013.06.28 |
---|---|
김치...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0) | 2013.06.28 |
류 현진과 이치로의 홈런 (0) | 2013.06.22 |
민율이 (0) | 2013.06.22 |
더운 여름엔 탐정소설이 제격! (0) | 2013.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