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음악양식을 완성한 '바흐'는 1685년 독일에서 출생해 1703년까지 바이올린 비올라, 오르간을 비롯해 음악교육을 받고, 아른슈타트, 뮐하우젠에서 오르간 연주자 생활을 하다 1714년 바이마르 궁정악단 수석 연주자기 되었습니다. 1717년부터는 쾨텐의 레오폴트 공작의 궁정악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그는 생애 최초로 교회음악 작곡(칸타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곡활동을 하였습니다. 그후 1723년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장에 취임하여 6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직하면서 작곡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첼로를 위한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무반주 첼로 조곡(모음곡)"은 1720년경 쾨텐시절에 쾨텐 궁정오케스트라 단원인 첼리스트 '아벨'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올린과 같이 화려하고 다양한 음색을 가지지도 못하고 기교의 범위도 좁은 그 당시의 첼로는 독주용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단지 합주에서 저음을 보강하고 다른 악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는데, 바흐가 이 "무반주 첼로 조곡"을 작곡함으로써 독주악기로서의 첼로의 가능성을 규명 하고 그 위상을 높여 첼로 역사의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흔히 첼로 음악의 구약성서라고 불려지는 "무반주 첼로 조곡"은, 19세기 이후 다른 바흐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다가 - 연주하기가 너무 어렵고 음악성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아 연습곡 정도로만 연주되고 있을 뿐이었다 - 20세기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가 발견, 연구, 연주하여 그후 첼로 음악의 최고의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새로운 양식의 도입과 독일 음악의 전통, 그리고 종교적 깊이까지 더해 그 내용과 형식의 절대성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 모든 첼리스트들이 정복하고 싶어 하는 필수적인 그리고 최고의 목표로 여겨지고 있다. 이 곡의 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잘스는, 13살 무렵 바르셀로나의 어느 고악보 가게에서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하고 12년간 홀로 연구 끝에 공개석상에서 연주하여 세상에 그 진가를 알리게 되었다. 거기에 대한 카잘스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우연히 한 가게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발견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인 신비가 이 6곡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라는 악보에 담겨져 있었다. 그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나도 선생님도 이 곡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발견은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조곡 전 6곡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 1번 낙관적(Optimistic), 제 2번 비극적(Tragic), 제 3번 영웅적(Heroic), 제 4번 장엄한(Grandiose), 제 5번 격정적(Tempestuos), 제 6번 목가적(Bucolic) 이러한 특성은 각 곡의 프렐류드(Prelude, 전주곡)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제 1번부터 제 6번까지 모두 프렐류드-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미뉴에트(혹은 부레나 가보트)-지그의 6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3번과 5번이 완성도가 높다고 하지만, 연주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이 무반주 첼로 조곡의 첫 관문인 1번은 바흐가 "1번"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만큼 1번은 전체 조곡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첫 주제를 제시하는 교향곡에 있어서의 1악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이 1번부터 우리가 접근해 가는 것은 전체 6곡을 모두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써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 1번은 그렇게 난해하지도 않고 특히 프렐루드가 개방현으로 연주되는 풍부한 울림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곡을 좋아하게 되신 후 직접 첼로를 배워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최근 CF에서 로스트로포비치 (EMI) 연주가 잠시 쓰임으로해서 대중적인 인기까지 끌고 있으니 더욱 반갑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
1.작곡배경 및 경과
1717년말,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 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가 그 곳 궁정악단의 악장이 되었다. 당시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당시 23세의 레오폴트로서 그는 쾨텐의 군주였다. 이 젊은 영주는 아름다운 테너 음성을 가지고 궁정악단에도 참가하여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쳄발로 앞에 앉아 통주저음의 반주를 맡을 정도로 아마추어의 경지를 벗어난 음악애호가였다. 이 영주의 신임과 이해를 얻은 바흐는 막혔던 봇물이 터져 흐르듯 이 기악곡의 창작에 매진해 나갔다. <<관현악 조곡 1,2번>>, <<브란텐부르크 협주곡>> 전6곡, <<두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바로 이 시대에 태어난 바흐의 기악곡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바흐는 이미 모델로서 배운 비발디 등 이탈리아 기악작품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특히 현저한 점은 악곡편성의 기본이 되는 주제라든가 동기의 철저하고도 치밀한 논리적 전개다. 당시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의 자격을 가진 첼로의 명수 아벨이 있었다. 바흐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악곡의 걸작들을 썼던 바, 오늘날 남아있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6곡과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쾨텐의 궁정 첼리스트였던 아벨을 위하여 작곡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당시까지 독주악기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던 첼로의 적극적인 연주기법 개발을 위해, 즉 첼로라는 악기의 연주교법을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명곡은 바흐가 죽은 뒤 무려 200년 가량이나 묻혀 있어서 전혀 연주되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이상으로 어려운 기교를 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6번처럼 현재의 첼로로서 연주하기는 매우 곤란한 고음역으로 씌어진 곡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이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현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덕택이다. 카잘스는 12세때부터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 천재였다. 그러나 카잘스가 특히 좋아했던 악기는 첼로였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마드리드의 호세 가르시아 (Jose Garcia)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카잘스는 곧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정식으로 익히는 한편, 실내악에 대한 연구도 체계적으로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13세 때의 일이다. 카잘스는 13세가 되면서부터 첼로주법의 결함을 깨닫고 새로운 기법을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버려져 있는 악보뭉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무한한 감동을 가지고 듣고있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카잘스의 나이 겨우 13세때 발견된 이 악보 뭉치야말로 근대 음악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때부터 카잘스는 이 악보를 꾸준히 연구하여 12년간에 걸친 고심끝에 전 6곡을 완전한 형태로 연주하는데 성공했다. 실로 200년 동안이나 묻혀있던 보석의 찬란한 빛이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카잘스와 이 모음곡은 하나의 동류항이 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이 모음곡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주한 것은 1909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처음으로 녹음을 단행한 것은 나이 60이 되어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곡은 모든 첼리스트들이 도전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한계점이요, 궁극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음곡을 가리켜 '첼로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
2. 특징
바흐가 쓴 기악곡 가운데서도 이 조곡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이나 하프시코드를 위한 조곡도 대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조곡은 언제나 무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바흐 이전에는 알라망드, 쿠랑트, 사라방드와 지그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러 종류가 되는 이러한 무곡의 양식화는 각각 다른 역사적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같은 형식의 무곡이라도 양식의 대조를 존재하게끔 인도하여 왔다. 미뉴엣과 가보트, 부레 등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새로운 무곡이었다. 바흐가 이 무곡들을 채택했을 때만해도 발레나 오페라에서는 이 춤들이 추어지곤 했었다. 바흐는 이 무곡들을 전통적인 조곡의 사라방드와 지그 사이에 삽입하였다. 그 시대의 다른 작곡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새로운 율동적인 생활을 위해서 춤이 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대한 시위는 보통 전통수용의 반동이라는 범위안에서 성취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곡을 작곡하는 데 있어서의 아이디어는 아주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무반주의 현악기를 위한 작품은 비올라 다 감바나 바이올린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조곡에 있어서의 무곡 악장들은 대개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주제와 상통하는 것과 화성을 암시하는 것 등이다. 전주곡을 머리에 두고 무곡들은 연주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도입적은 곡들은 여러가지 형식이 있는데, 형태가 대조되는 전주곡의 6조곡에서의 내용의 성격화는 다른 형태의 전통무곡과는 다르게 선택된 새롭고 짧은 무곡 등을 삽입함으로 다른 곡들과 의식적으로 다르게 한 의미는 바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했다. 각 조곡에 있어서 조성의 선택도 같은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도입악장의 선택도 같은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무곡의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한편 바흐 조곡의 에디션은 그의 둘째 부인 막달레나의 필사본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Johann Sebastian Bach
"그는 "개울"(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려야 한다." --(2)
낭만주의자들은 최초의 영감을 중요시했고 이것을 고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하에게 영감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가공 작업이 더 중요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교회에서 음악회장으로 끌어내어 예배와 상관없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적 바하는 이들의 생각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바하 당대에는 음악 자체가 낭만주의에서처럼 종교로까지 격상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은 높은 목적을 위한 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바하는 교회를 위한 음악적 봉사자였다.
그는 오선지를 메우는 작업을 하여 -상당 기간- 매주 칸타타 하나씩을 써냈다.
당대의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러한 일을 했다.
그래서 바로크 전성 시대의 작곡가들보다 더 많은 양을 작곡한 시대는 없었다.
한 마디로 음악의 "생산 시대"였다.
따라서 졸작이 범람한 시기이기도 하다.
바하가 아무렇게 작곡해도 나무랄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하는 신비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에 대한 자발적 성실성의 면에서는 바하와 경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실성은 의도적인 것을 넘어서 음악으로 그대로 구체화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꼬박꼬박 기일을 지켜 작곡해 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작업을 일상화하여 이를 꾸준히 지탱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도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하를 그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서 바하를 보았다.
바하가 낭만주의와 잘 부합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낭만주의자는 바로 베를리오즈 이다.
그는 바하에 관해 증오를 토로한다.
그의 몽상과 엄격한 바하 음악의 구조는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배우고 숙고하는 바하의 음악과, 저항하고 고백하는 그의 음악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의 음악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나 바하의 음악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바하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려면 그 때까지의 음악에 관한 전체적 특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만큼 많은 요소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음악이다.
그러나 남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의 폴리포니 음악이다.
연주자들이 자기의 성부가 다른 성부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각 성부들 하나하나가 다듬어져 있다.
심지어는 독일 찬송가에 화성을 붙인 호모포니적 코랄에서도 각 성부들이 상당한 독자성을 갖는다.
단선율 멜로디 를 중심으로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음악은 우선 어느 부분이 멜로디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불과 서너 개 음으로 구성된, 빠르게 움직이는 모티브는 음악을 끝없이 움직이게 하여 일정한 주기를 감지하기 어렵게 한다.
바하의 음악을 말할 때에는 주로 이 부분에 관한 것이지, 느린 악장의 선율적 음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