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시렁거리기...^^

가장 위대한 스승과 제자 알베르 까뮈와 쟝 그르니에

또하심 2012. 11. 10. 14:38

 

공감과 차이 통한 상승된 사제지간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국민일보 | 2012.11.09 10:11

1930년 10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수도 알제의 그랑 리세(중고교). 프랑스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1898∼1971)는 신학년도 초에 자신이 맡은 반 학생들 가운데 알베르 카뮈(1913∼1960)라는 학생을 주목한다. 그르니에는 32세, 카뮈는 17세였다. 하지만 카뮈는 폐결핵 발병으로 장기간 결석하게 되고 이듬해 가을, 재수를 하게 됐을 때 둘 사이의 우정은 급속도로 발전한다. 이때부터 카뮈가 47세를 일기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주고받은 편지들은 두 사람이 평생에 걸쳐 나눈 내밀한 대화의 총체와도 같다. 카뮈 편지 112통, 그르니에 123통이다.( 친구와 여행중 자동차 사고로)

이 서신들을 묶은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책세상)에서 카뮈는 첫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선생님께서 읽어보시고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그에 따라 저는 제가 정했던 목표, 현재 저의 처지를 잊어버린 채 추구하고자 노력하려던 목표를 그대로 간직하든가 포기하든가 할 생각입니다."(1932년 5월 10일)

그르니에의 에세이와 그가 빌려준 몇 권의 책을 통해 문학에 눈 뜬 카뮈는 스승의 독려로 알제에서 발간되는 잡지들에 글을 발표한다. 그르니에는 종종 그런 식으로 몇몇 제자들을 독려했다. 그중 프랑스 학자 베르그송의 철학을 소재로 에세이를 쓴 카뮈는 단연 발군이었다. 바다와 여자아이들, 그리고 축구에만 열광하던 소년 카뮈는 그런 식으로 문학에의 개종을 경험하게 된다.

거의 1년 내내 안개와 비로 칙칙한 프랑스 브르타뉴 출신인 그르니에와 태양과 바다 그 자체였던 알제 출신의 카뮈는 두 지방의 기후만큼이나 달랐다. 저 너머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했던 스승과는 달리, 카뮈는 이 지상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바로 이 지점, 카뮈와 그르니에라는 두 작가의 지적 운명이 맞물리면서 서로 발전하는 모습이야말로 문학을 통한 상승된 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늘 길항했던 것은 아니다. 카뮈가 생각할 때 그르니에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느낀 것은 1936년 무렵이었다. 젊은이로서 공산당은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경험이라고 강조하던 그르니에는 강연을 통해 정치적 참여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카뮈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공산당을 탈당한다. 스승으로부터 배반당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카뮈가 1942년 '이방인'으로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후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뜸해진다. 카뮈는 몹시 바빴다. 게다가 더 이상 옛 스승의 충고를 전과 같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근본적 세계관이 달랐던 만큼 둘의 대화에는 차이에서 기인한 대립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사제의 관계를 카뮈는 "예속도 복종도 아닌 대화요 교환이요 상호대조였으며, 영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라고 회상했다.

1959년 말, 그르니에가 에세이집 '섬'의 서문을 부탁하자 카뮈는 기꺼이 글을 써주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 되고 말았다. 그르니에 역시 마지막이 되고만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변함없는 우정의 증표를 보여주어 나를 자꾸만 놀라게 합니다. 내가 그런 우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1960년 1월 1일) 김화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