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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고전이 고전인가(Why a Classic is a Classic)

또하심 2008. 6. 28. 11:37
 

왜 고전이 고전인가(Why a Classic is a Classic)


아널드 베네트


우리 동료 시민들은 비행기나 입법프로그램에 대해 쏟는 정도의 관심은 문학에 대해서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문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학에 전혀 무관심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희미하고 형식적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관심이 격렬하다면 그 관심은 경련적인 것이 되고 만다.  10년 전 어떤 대중소설을 유행시켰던 열정적인 20만의 사람들에게 지금 그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물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이 그 소설에 대해 완전히 잊었고 더 이상 그 소설을 다시 읽을 생각도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혹여 그들이 다시 읽는다 해도 그 소설을 즐기며 읽진 않을 것이다. 그 소설이 10년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빠서가 아니고, 독자들의 취미가 개선되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항구적인 즐거움의 수단으로 삼을 만큼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무엇이 자신을 즐겁게 하는가를 모를 뿐이다.


아마도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전 저자의 위대하고 보편적인 명성은 지속하는가?  답변은 다음과 같다. 고전 저자의 명성은 전적으로 다수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길거리의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것이 보름이나마 지속할 거라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고전 저자의 명성은 애초에 열정적인 소수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소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최상급의 저자가 그의 생애 중에 무한한 성공을 누렸다 할지라도, 다수는 자신들이 2류 저자를 평가했던 만큼 결코 진지하게 그를 평가하지 않아왔다.  그는 항상 열정적인 소수의 열의에 의해 힘을 얻어 온 것이다.  그리고 사후에 영광을 얻은 저자의 경우에도 그 행복한 결말은 전적으로 소수의 완고한 고집에 기인해왔다. 그들은 결코 그를 홀로 둘 수 없고, 홀로 두지도 않는다.  그들은 계속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계속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한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대단한 열정을 지닌 채 너무도 권위 있게 자기 확신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마침내 다수는 그의 이름에 익숙해지고, 그가 천재라는 제안에 조용히 동의한다. 다수는 무엇이건 간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천재의 명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살아 있게 되는 것도 열정적인 소수의 덕이다. 이 소수들은 항상 작업에 열중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천재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들의 호기심과 열정은 끝이 없어서 천재가 무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은 다수의 판결에 찬성하기도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반대하기도 한다.  다수는 명성을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도 부주의하다.  만약 우연히 열정적인 소수가 어떤 특정한 경우에 다수와 일치했다면 그들은 다수에게 어떠어떠한 명성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킬 것이고 다수는 게으르게 동의할 것이다.


맞다. 어쨌건 우리는 어떠어떠한 명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는 기억의 독려 없이는, 그 명성은 망각이라는 죽음으로 곧 빠져들 것이다.  열정적인 소수들은 진심으로 문학에 관심이 있고, 문학이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유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한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동일한 언급을 영원히 계속해댐으로써 문학적 명성의 세계를 정복해 나간다.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길거리의 사람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대를 이어 일만 번 듣게 되면, 그는 지성으로는 아니라 해도 신념으로라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역시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예술가였다고 반복하게 되고 셰익스피어 작품의 전집을 사서는 그의 서가에 꽂고 ‘리어왕’이나 ‘햄릿’에 동반하는 경이로운 무대 효과를 보러 가는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거의 종교적으로 확신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 열정적인 소수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탄을 자신들에게만 한정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학적 취향을 형성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머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무엇이 그 열정적인 소수로 하여금 그러한 소동을 일으키도록 만드는가?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문학에서 예민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맥주를 즐기듯이 문학을 즐긴다. 이 즐거움의 반복이 문학에 대한 그들의 흥미를 살아 있게 만든다.  그들은 영원히 새로운 탐구를 하고 영원히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을 배운다. 그들의 취향은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더욱 더 확고한 것이 된다.  그들은 내일이면 따분해 질 것을 오늘 즐기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책을 따분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많은 대중의 객설도 그 책이 즐길만 하다고 그들을 설득할 수 없고, 그들이 그것을 즐겁다 생각하면 길거리 군중의 아무리 차가운 침묵도 그 책이 뛰어나고 영원한 것이라는 그들의 신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확신한다.


그 열정적인 소수에게 날카롭고 영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은 책의 어떤 특질인가?  이것은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라 한 번도 완벽하게 답변된 적이 없다.  당신은 아마도 진실, 통찰, 지식, 지혜, 유머 그리고 미 등을 쉽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한 답변들이 당신을 진정으로 멀리까지 이끌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각각이―특히 처음 것(진실)과 마지막 것(미)이―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키이츠가 가벼운 태도로 미가 진실이고, 진실이 미이며, 그것이 그가 알아야할 혹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로서는 지당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심지어 해즐리트나 생뜨 베브조차도 왜 그가 어떤 책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를 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내 가까이 있는 시집의 첫 번째 행을 취하겠다.


                             아르카디아의 숲은 죽었고

                             그들 고대의 즐거움도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이 행들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왜?  답은 없다! 나는 단지 그 열정적인 소수가 이 행들로부터 신비스러운 즐거움을 얻어내는 데 있어 나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나는 같은 저자의 다른 많은 시에 대해 우리가 누리는 생생한 즐거움은, 궁극적으로 다수로 하여금 예이츠가 천재라는 것을 믿도록 추구한다는 것을 확신할 뿐이다.  문학적 상황에 있어서 한 가지 든든한 측면은 열정적인 소수는 동일한 것에 대해 열정적이라는 점이다. 흥미의 연속은 그 실제의 적용에 있어서 긍극적으로 동일한 판단에 이른다.  흥미의 폭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열정적인 소수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정통성을 결여한다.  혹은 오히려 그들의 흥미 전부를 하나의 좁은 영역에 한정시킨다.  그들은 무엇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 들은 특별히 협소한 영역의 천재를, 예를 들면 크래쇼 같은 사람들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애쓴다.  그러나 그들의 적극적인 편애가 열정적인 소수의 일반적 판결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판결에 힘을 실어준다.


고전이란 문학에 강렬하고 항구적인 관심을 갖는 소수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즉, 즐거운 감각을 갱신하기를 열망하는 소수가 영원히 호기심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끊임없는 재발견의 과정에 종사하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고전은 어떤 윤리적 이유 때문에 살아남지 않는다. 또한 어떤 규준에 맞기 때문에 살아 숨 쉬는 것도 아니요 혹은 소홀함에 의해 고전이 사라질 뻔한 위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것도 아니다.  고전이 우리 앞에 살아 있는 것은, 그것이 즐거움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치 벌이 꽃을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열정적 소수가 그것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열정적 소수는 “올바른 것들”을,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올바른 것들”은 열정적인 소수가 그것들을 읽기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올바른 것이다.  그리하여―이제 나의 요점에 다달은 바― 문학적 취미에 꼭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뜨거운 흥미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따라올 것이다.  지금 당신이 어떤 고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흥미를 가질  때의 추진력이 당신으로 하여금 경험을 얻도록 할 것이고, 그 경험이 당신에게 즐거움의 수단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당신은 아직 당신의 비밀스러운 방식을 모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연속적인 흥미가 불가피하게 당신에게 가장 날카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물론, 그런 경험이 덜 현명하게 획득될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마치 푸트니에 가기 위해 월램 그린을 경유할 수도, 혹은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돌아갈 수도 있는 것처럼……


   

아널드 베네트[(Arnold Bennett) 1867~1931년]

영국의 소설가. 스태퍼드셔 주의 헨리에서 태어났다. 법무관이던 아버지 밑에서 견습생으로 있다가 법무관이 되기 위해 런던으로 갔으나, 1889년 한 잡지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문학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평론가 생활과 잡지 편집부장을 거치면서 첫 번째 소설 『북쪽에서 온 남자』를 발표해 비평가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이후 전업작가로 생활하며 1902년에 가장 대표적인 소설인 『파이브타운의 안나』를 발표했다.

1903년 파리로 가서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가들인 플로베르와 발자크의 소설을 연구했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조지 무어의 소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8년 동안 파리에서 소설과 극본을 썼으며, 소설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평론들을 많이 남겼다. 1908년에 발표한 『늙은 부인네들 이야기』는 영미권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둬 191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출처 : 바벨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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