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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Nikolaus Harnoncourt / 1929 베를린~

또하심 2008. 2. 9. 16:23

 

 

 

 

 

 

 

Nikolaus Harnoncourt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베를린 1929 ~ )

 

아르농쿠르는 1929년12월6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룩셈부르크의 로트링백작 가문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합스부르크왕가 대공작 요한의 증손녀이었다. 대공작 요한(steirischen Habsburger-Erzherzogs Johann, 1782-1859)은 19세기 오스트리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베를린에 있던 아르농쿠르의 아버지인 에버하르트는 토목엔지니어였고, Spree-Havel운하의 공사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우스가 태어난 후 가족들은 옛고향인 그라츠로 돌아온다. 니콜라우스는 남매들과 함께 팔라이스 메란(Palais Meran)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독일과 함께 오스트리아가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기 시작한 1938년 대공작 요한에 의해 지워진 메란궁은 강제로 팔리게된다. 1963년부터 이 메란궁은 "그라츠 국립음대(Grazer 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의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형 레네(중앙), 동생 필립(좌)과 함께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1933,34년 겨울

 


3.그룬트제에서 알리스, 레네, 필립과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앞에서 두번째) - 1937년 여름

 

아르농쿠르은 이미 유년시절부터 확실한 본질적 특성을 보인다. 표출되지 않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후에 솔직하고 독립적인 자기만의 것을 갖게된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Ich konnte nichts einfach so akzeptieren)."라고 그는 후에 말한다. 이러한 아르농쿠르의 본성은 그가 13세때 "새로운 시대의 문화사(Kulturgeschichte der Neuzeit)"를 저술한 빈의 문화역사가, 문예가, 카바레리스트, 연극배우였던 에곤 프리델(Egon Friedell)이 1938년 나찌가 오스트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항거하기위해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확실해 진다. 프리델은 아르농쿠르의 삶에 있어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그라츠의 음악선생인 한스 코르트샥(Hans Kortschak)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다. 형인 필립과 함께 네손으로 피아노연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형제는 그라츠 돔성당(Grazer Dom)에서 복사를 하면서 교회음악의 기초지식을 쌓게 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가족들고 함께 정기적으로 음악연주를 한다.

 


4.아르농쿠르 가족 브란트호프에서 - 1941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그라츠는 심한 폭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성탄절기에 가족은 친척이 있던 잘츠캄머굿(잘츠부르크 인근 지역을 통칭)의 그룬트제로 이사를 한다. 이로인해 그곳에서 첼로주자인 파울 그륌머(Paul Grümmer)를 만나면서 아르농쿠르는 음악적 발전에 아주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된다. 그륌머는 유명한 "부쉬 사중주단(Busch-Quartett)"의 일원이었고 게다가 아주 훌륭한 교육가 였으며, 이전에는 빈 음대에서 교수였다. 전쟁후 그라츠로 돌아온 아르농쿠르는 다시 코르트샥에게 배우게 되고, 1948년까지 그륌머에게 재능있는 학생으로써 첼로를 사사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연주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944년부터 니콜라우스는 인형극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가 쓴 "인형극에 대하여(Über das Marionettentheater)"에 영감을 받은 그는 열정적으로 직접 인형을 조각하고, 옷을 붙이고, 무대를 만들고, 팀을 구성하여 인형극을 무대에 올린다. 그라츠 아템궁(Grazer Palais Attem)에서 20번의 공연을 하는 큰성과에도 불구하고 인형극으로 생활을 할수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1947년 가을 라디오로 푸르트�글러(Furtwängler)의 베토벤 7번 교향곡을 듣는 것은 그가 음악을 계속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듬해 니콜라우스는 음악을 공부하기위해 빈으로 간다. 빈 필하모니커의 솔로첼로주자인 엠마누엘 브라벡(Emanuel Brabec)의 학생으로 들아간다. 1952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그해 가을 그는 빈 필하모니커의 수석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에 의해 단원으로 발탁되며, 1969년까지 첼로주자로 활동하게 된다.

 


5.빈 감바 사중주단, 잘츠부르그에서,아텐부르거, 호펠너, 아르농쿠르, 멜쿠스 - 1950, 8

 

이미 1949년 아르농쿠르는 멜쿠스(Eduard Melkus), 알텐부르거(Alfred Altenburger) 그리고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알리스 호펠너(Alice Hoffelner)와 함께 원전악기로 연주하는 "빈 감바 사중주단(Wiener Gamben-Quartett)"을 구성한다. 이때부터 원전악기의 소리와 연주법에 대한 연구를 하기시작한다. 그 당시 "연주생활의 중요성을 잊은체 몇 명의 망상가를 위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물, 유별난 것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빈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의 선생이었던 마틴(Josef Mertin)는 원전음악의 선도자였다. 1950년 바흐의 해에 알버티나 연주회(Albertina-Konzerte)의 일환으로 빈 감바 사중주단이 "푸가의 예술(Die Kunst der Fuge)"를 마틴의 학생들에게 연주하는데 청중의 반응은 섞여있었다.

 



결혼식 그라츠 - 1953년 6월

 

1953년 아르농쿠르는 알리스 호펠너(Alice Hoffelner)와 결혼하며, 1961년까지 4명의 자녀를 얻는다. 같은해 원전악기와 르네상스, 바로크음악의 연주를 본격적으로 하기위해, 부인을 포함해서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빈 콘센투스 무지쿠스(Concentus Musicus Wien)"를 결성한다. 긴시간동안 그들의 연주는 사적인 자리에서만 이루어졌으며, 비로소 1957년 5월 빈 쉬바르첸베르크궁(Palais Schwarzenberg)이 재개장할 때 공개적 연주의 첫발을 내딛는다.

특히 특별한 앙상블의 구성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연주에 맞는 원전악기들이었다. 아르농쿠르는 벌써 1950년대에 역사적 악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악기을 얻기의해서는 재정적인 것도 문제였지만, 정확한 정보와 감각이 필요했으면, 때때로 교묘한 수단을 써야만 했다. 60년대말 아르농쿠르는 악기수집과 관련있는 수 많은 에피소드를 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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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그 쉐프트라인(Jürg Schaeftlein),

아르농쿠르, 오토 플라이쉬만(Otto Fleischmann) - 60년대 중반

 

 

빈 콘센투스 무지쿠스의 시작은 어려웠다. 비평가들 중 회의론자들 사이에는 전체음의 화려함이 없고, 고전 관악기의 부족함, 현악기의 짧은활 등등 비판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농쿠르 는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지속했고, 1958년 쉬바르첸베르크궁에서 콘센투스 무지쿠스는 정기적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1966년 미국에서 연주여행을 갖고, 1968년 독일 순회연주를 한다.

연주와 병행하여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음악철학적으로 분석한 "음언어인 음악(Musik als Klangrede)"을 저술한다. 잊혀진 작품과 흐트러진 음경험의 코스모스를 여는 것으로 현재까지 이책은 원전연주에 있어 기본서이다. 1973년부터 정년하는 1993년까지 아르농쿠르는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고음악의 이론과 실제(Theorie und Praxis der Alten Musik)"의 세미나에서 원전악기의 역사와 연주법를 가르친다. 또한 1900년까지를 포괄하는 "고음악(Alte Musik)"이라는 대작을 남긴다.

1971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1950년부터 친분이 있던 쳄발로연주자인 레온하르트(Gustav Leonhardt)와 작업을 시작하며, 1989년까지 바흐 칸타타 전곡을 녹음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빈 콘센투스 무지쿠스(Concentus Musicus Wien)와 레온하르트 콘소트(Leonhardt-Consort)가 함께한다.

 

 


몬테베르디 오페라 공연, 취리히 - 1975년

 

1972년 아르농쿠르는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로 밀라노의 피콜라 스칼라(Piccola Scala)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디자이너이며 무대감독인 포넬레(Jean-Pierre Ponelle)와 공동으로 "공연역사(Aufführungsgeschichte)"를 저술한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L’Orfeo로 시작하는 몬테베르디 오페라가 연속적으로 공연된다. 1980-89년에는 모짜르트의 오페라들(루치오 실라 Lucio Silla, 뒤에껀 폰토의 왕 미트라다테 Mitridate re di Ponto, 돈 죠반니 Don Giovanni, etc.)이 올려진다. 이들 공연들을 통해 정규적인 취리히 오케스트라로부터 몬테베르디와 모짜르트 앙상블을 구성하고 원전악기 연주법을 습득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 잘추부르크 모짜르트 주간을 통해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Concertgebouw Orkest Amsterdam)"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지휘자로써 첫무대를 갖는다.

1985년 그라츠에 스튀리아르테 페스티발(Festival styriarte)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그라츠 출신인 아르농쿠르를 그라츠시로 데려오기위한 일환이었다. 현재까지 이 페스티발은 그가 추구하는 작업의 기본토대로서 계속 개최되고 있다. 개최년에는 아르농쿠르는 콘센투스 무지쿠스와 함께 두개의 바흐 수난곡을 연주한다. 많은 호응을 얻었던 공연들에는 슈베르트의 정신 드라마 "라짜루스(Lazarus)", 슈만의 오라토리오 "낙원과 요정 페리(Das Paradies und die Peri)", 베르디 "레퀴엠(Requiem)" 등이있다.

 

아르농쿠르 부부, 그라츠의 스튀리아르테 - 1985년

 

1987년 아르농쿠르는 콘센투스 무지쿠스에서 첼로를 마지막으로 연주한다. 70년대부터 그는 지휘자로써 유명 오페라하우스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된다. 함부르크 국립오페라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 빈 국립오페라에서 모짜르트 시리즈, 잘츠부르크 페스트쉬필에서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e Poppea)",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죠반니(Don Giovanni)", "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등을 연주하며,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베버의 " 마탄의 사수(Freischütz)", 슈베르트의 " 악마의 욕망의 성(Des Teufels Lustschloss)", "알폰소와 에스트렐라(Alfonso und Estrella)", 오펜바흐의 "La belle Hélène", "La Périchole", "La Grande-Duchesse de Gérolstein", 베르디의 "아이다(Aida)" 등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작업들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Concertgebouw Orkest Amsterdam)", "유럽 실내악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 빈 필하모니커, 베를린 필하모니커 등과 함께 하였으며, 수 많은 레파토리들과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드보르작, 브루크너 그리고 벨라 바르톡(Bela Bartók), 알반 베르크(Alban Berg) 등의 작곡가들의 곡을 지속적으로 새로운 작업한다.

 

연습장면, 그라츠 - 1997년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아르농쿠르는 편안한 지휘자가 아니다. 그는 알려진 오류를 수정하고 본인의 해석이 표기된 자기의 악보자료를 나누어 주며, 자신이 작업한 세부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그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연습을 적게 또는 거의 시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발전과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피하기위해 의식적으로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자리를 맡지 않았다.

아르농쿠르와 그의 작품들은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1980년 "에라스무스 상(Erasmus-Preis)", 1985년 고음악에 기여로 독일 음반비평가회가 수여한 "황금 명예바늘상(Goldene Ehrennadel)", 1994년 스웨덴 왕궁 음악아카데미가 수여한 "폴라 음악상(Polar Music Prize)", 2001년 최고 합창연주로 받은 "그레미상(Grammy)", 2002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Ernst-von-Siemens-Musikpreis)" 등이 있다.

 


유럽 실내악 오케스트라, 그라츠 - 2004년

 

1991년 모짜르트해를 마치면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자신의 음악이해에 대한 근본적 진실함을 말한다. "우리 음악가들(당연히 모든 예술가들을 포함해서)은 강력하고 성스러운 언어(machtvolle, heilige Sprache)를 관리한다. 우리는 그것을 물직적 변화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인류가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통해 얻은 이성적, 논리적, 매혹적 언어와 사고를 제한받지않기 위해서, 늦지 않길 바라지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이런 이탈현상이 신앙의 부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니다. 기술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복지지상주의 등은 종교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도덕도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고상한 부가물이 아니다. 예술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태줄이며, 인간존재를 보장한다."

 

 

출처 : 음악은 기도다
글쓴이 : potami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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