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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Arthur Grumiaux 1921 -1986 벨기에

또하심 2008. 2. 9. 16:21

 

 

 

 

Arthur Grumiaux 1921 -1986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왕립음악원과 샤를루아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파리에서 조르주 에네스쿠에게 배웠다. 1939년 비외탕상(Vieuxtemps Prize)을 받았고 1년 뒤에는 벨기에 정부가 주는 '거장상'(Prix de Virtuosité)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1940년 브뤼셀에서 데뷔한지 얼마되지 않아 예술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벨기에가 점령됨으로써 중단되었으나 1945년 다시 연주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런던 무대에 데뷔하여 빠른 속도로 유럽과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그는 스승이던 알프레드 뒤부아의 뒤를 이어 브뤼셀 음악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베토벤, 모차르트 소나타(클라라 하스킬이 반주)를 연주한 음반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의 연주는 세련된 우아함과 완성된 기교를 함께 갖추고 있다. 벨기에 정부로부터 1973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아르투르 그뤼미오 - 20세기 마지막 궁정 연주자
그는 항상 내게 말했다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태도가 가장 불행한 상태다. 바이올린 이전에 음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이올린을 위해 음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이야말로 바이올린이 l되어야 한다" - 오귀스탱 뒤메이

그뤼미오의 생애
그뤼미오는 1921년 3월 21일, 벨기에의 빌레르페루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마을의 밴드 마스터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렇다 할 음악적 환경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5세때부터 2개의 막대기를 사용해 바이올린을 켜고 흉내내곤 했는데, 그 흉내내는 리듬과 활 켜는 법 등이 예사롭지 않아 곧 작은 진짜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던 할아버지에게 간단한 음계 연습을 배웠을 뿐이지만, 반 년 쯤 지났을 땐 이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솜씨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천재적 기질을 타고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자질에 주목한 부모는 그를 샤를르 루아 음악원에 보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뤼미오의 학습 속도는 너무도 빨리 진척되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분야에서 우승을 받은 그는 12새의 나이로 브뤼셀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거기서 알프레드 뒤부아(198-1949)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진 아부실에게 대위법, 푸가 등 기초를 닦았다. 뒤부아는 이자이의 직계 제자인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프랑크 소나타가 남겨진 SP 음반 등을 들여보면, 비록 스케일은 작지만 세련된 기품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뤼미오는 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뒤, 1936년(15세)에 파리로 가서 당시에 망명해 있던 대가 조르주 에네스코에게 다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9년에 앙리 비외탕 콩쿠르와 프랑수와 프룀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엔 벨기에 정부로부터 비르투오지네 상을 수상하여 유럽 바이올린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의 데뷔 무대는 그로부터 몇 년 지난 1943년에 펼쳐졌다. 샤를르 뮌슈가 지휘하는 브뤼셀 필과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 데뷔 무대였다. 그러나 이제 막 비상의 날개를 펼치려는 그에게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라는 시련이 들이닥쳤다.

그뤼미오는 애국심 강한 사람이었다. 독일 점령 시절엔 모든 연주회를 거부했다. 이 당시 스승인 뒤부아와 프로 아르티스 현악 사중주단의 멤버로 잠시 활동한 바가 있었는데, 이 활동은 공식적인 작은 연주회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뤼미오는 활동을 재개했다.

1945년 BBC 심포니와 협연 해 영국에 데뷔했고, 같은 해 파리에서 뮌슈와 모차르트 협주곡 3번을 협연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로인해 그에겐 한동안 '티보의 재래'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31세 연상인 명 연주자 자크 티보(1880-1953)와 그뤼미오는 예술적 풍모에서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은 현란한 기교로 청중을 정복하려는 스타일이 아니라 긴장되고 청초한 음으로 영혼을 매혹시킨다는 점에서 티보와 동일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그뤼미오는 한동안 파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스승 뒤부아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벨기에 정부와 왕립 음악원은 그들의 바이올린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그뤼미오가 도와줄 것을 종용했다.

결국 약관 28세의 그뤼미오는 브뤼셀 음악원 바이올린 교수로 초빙되어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진 양성을 힘을 쏟게 되었다. 아르투로 그뤼미오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해지게 된 것은 1950년대 초부터 60년대까지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과 듀오로 활동하면서 부터이다. 그뤼미오와 하스킬의 만남은 1950년, 두사람이 프라드의 카잘스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하여 베토벤의 소나타 10번을 함께 연주한데서 시작된다.

이때 그뤼미오는 하스킬이 가진 음악성에 깊은 영향과 일치감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27년이나 나는 차이였지만, 오히려 이 차이가 모녀나 오누이처럼 따스하고 맑은 음악을 선사하게 만들었다. 하스킬이 세상을 떠난 후, 그뤼미오는 베이용 라크루라, 파울 크로슬리 등과 듀오를 벌였지만, 하스킬 같이 완벽한 어울림은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비올라의 조르쥬 얀체, 첼로의 에바 차코와 함께 그뤼미오 3중주단을 결성하여 앙상블 활동을 벌인 일도 간과할 수 없다.

인간과 그의 음악
그뤼미오는 조용하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사생활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애호가들 또한 그런 것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무대도 원치 않았고, 만년엔 거의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도 극도로 피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왜 그러냐고 질문했다. 그뤼미오는 당연하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의 사생활은 나의 음악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내 음악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내 연주를 들으러 오거나, 내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된다.

그러니 인터뷰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해서 그가 괴팍하다거나 외골수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뒤메이를 비롯한 브뤼셀 대학의 많은 제자와 주변인들이 그에 대해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증거한다. 단지 그가 싫어한 것은 기자나 장사꾼처럼 음악 외적인 것으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만년에 들어선 연주 횟수를 극도로 줄이고, 교육과 레코딩만 전념했기 때문에 그의 사적인 부분은 더욱 베일에 가려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음악적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 바이올린의 스승이라 불리는 비오티는 1780년대 파리에서 몇 명의 재능 있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중에서 바이요는 프랑스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모랭, 카페 등 프랑스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키워냈다.

로드는 베를린에서 독일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키워내는가 하면 헝가리 바이올린의 선구자인 뵘을 길러냈다. 만하임 출신의 픽시스는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보헤미아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당시 비오티의 또 한명의 제자로 벨기에에서 건너온 로베레쉬츠는 비오티에게서 수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건너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오늘날 우리가 벨기에 악파라고 부르는 바이올린의 줄기가 이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베리오를 길러냈고, 베리오는 비외탕으로 이어지며, 비외탕은 이자이라는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를 탄생시켰다. 이자이가 길러낸 제자가 바로 뒤부아와 에네스쿠였다. 따라서 뒤부아와 에네스쿠에게 배웠으며 벨기에 왕립음악원의 바이올린과를 무려 30년 이상 지켜 온 그뤼미오야 말로 벨기에 악파의 적자인 셈이다.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은 예를 들면 크라이슬러나 하이페츠가 강렬한 개성으로 음악팬을 사로잡는 형태가 아닐지 모른다. 또 오이스트라흐나 스턴처럼 그 포용력과 친화력에서 대다수의 음악팬을 만족시키는 타입의 연주가도 아닐 것이다.

그뤼미오는 우선, 누구나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음의 소유자였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에 음량, 음색에 있어서도 그는 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표출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음량은 항상 적은 듯 하게, 음색은 긴장시켜서, 그리고 쓸데없는 정감의 과잉에 빠져들지 않도록 절도있게 연주한다.

세련과 절도의 미는 결코 금욕적이거나 단조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뉘앙스, 극히 섬세하면서도 단아한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한 테크닉과 리듬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간혹 그는 고운 음색으로 인해 낭만주의자나 서정주의자로 분류되는데, 이 점은 분명 오류다. 그뤼미오는 오히려 구시대의 낭만주의적 대가들에게서 볼 수 있던 템포 루바토, 포르타멘토, 그 밖에 장식을 잘라내는 편이었다. (그렇다고해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번성했던 즉물주의적 연주가들의 무리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서정주의는 음밀하게 말하자면 '로코코적 유사 서정주의'다. 그의 서정은 센티멘털한 것이 아니라 상처입기 쉬울 정도로 섬세한 것이었다.

참고로 그뤼미오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애용했는데, 레코딩에는 주로 '타이탄'이라는 이름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그러나 콘서트에선 '엑스 헬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744년 과리넬리 델 제수를 사용했다. 또한 그는 활을 조금 느슨하게 쓰는 편이었다고 한다. 우아하고 맑은 음색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14세부터 21세가 될 때까지 거의 매일 그뤼미오의 지도를 받은 바 있는 직계 제자 오귀스탱 뒤메이는 그뤼미오가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이 말이었다고 한다. "악보 가운데 한 음부라도 사소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potamia

 

출처 : 음악은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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