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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앙드레 클뤼탕스 Andr Cluytens (벨기에의 앤트워프 1905~1967) / 지휘자

또하심 2008. 2. 9. 16:22

 

Andr Cluytens 앙드레 클뤼탕스 (벨기에 앤트워프 1905 ~ 1967)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태어났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앤트워프의 왕립음악학교에서 배우고, 1921년 피아노로, 그 이듬해에는 화성과 대위법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앤트워프의 왕립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그 이후는 왕립극장의 제1지휘자가 되었다.

 

1927년 프랑스 왕립극장에서 비제의 오페라 [진주잡이]를 통해 지휘자로서 데뷔하였으며, 이어서 1932년 툴루즈의 카피톨 극장의 지휘자 겸 음악 감독, 1935년에는 리옹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1938년에는 보르도 대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한편 비시의 그랑 카시노에서는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따라서 클뤼탕스가 연주회를 지휘한 것은 33세부터였다. 1942년 리옹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겸 음악 감독, 1943년에는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국립방송 관현악단과의 계약이 성립하였다. 이로부터 클뤼탕스와 프랑스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44년 파리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 1947년에는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고 유럽에서 처음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49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부회장과 지휘자로 임명되고, 프랑스 음악에의 공헌의 공적을 인정받아 레종 도뇌르 기사에 서위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의 주임 지휘자가 되어 유럽, 소련, 미국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 연주회와 극장에서의 그의 공적을 빌란트 바그너가 인정하여, 1955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초빙되어 그의 새로운 연출에 의한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상연 시켰다.

 

1956년에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1958년에는 [로엔그린]을 지휘함으로써 클뤼탕스는 처음으로 프랑스파를 바이로이트에 심는 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빈에서도 환영을 받아 자주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1967년 6월 3일 암으로 파리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클뤼탕스의 바그너는 연출가 빌란트 바그너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의 [마이스터징어]는 템포, 리듬, 강약에 대하여 전통적이 아니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감각은 독일적이 아니고 프랑스적이며, 그것도 섬세하고 색채가 풍부한 남프랑스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제, 라벨, 루셀 등의 근대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에 있어서는 그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났다. 그의 음악에 대한 청결하고 고귀한 태도는 베토벤의 연주까지도 음악적으로 풍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연주에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노정시키지 않았던 지휘도 드물다. 그는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고 항상 음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지휘자이기도 하였다.

 

레코드는 상당히 많이 발매되고 있어서 고전파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 (세라핌)을 들 수 있으며, 프랑스 작품으로는 포레의 [레퀴엠], 라벨의 [관현악 전집], 베를리오즈의 [관현악 전집]과 [서곡집], 비제의 [아를의 여인 (제1모음곡, 제2모음곡)], 프랑크의 [교향시집](이상 에인절)이 뛰어나다          - 웹발췌 -

 

 

potamia

 

출처 : 음악은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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