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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호루비츠를 위하여

또하심 2007. 3. 1. 21:26
 
 
피아노가 노래가 아닌 타악기로서의 리듬을 울리거나, 혹은 딱딱한 타격음을 내는 목적, 즉 두들겨대는 것이라면 그 순간부터 나는 두 번 다시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겠다’
                           -Vladimir Horowitz -

1986년 모스크바 콘서바토레 연주홀, 거기에 한 장의 포스터가 붙습니다. 1925년 러시아를 떠난 후 60여년 만에 돌아온 여든 두 살 노 피아니스트의 귀국연주회 포스터입니다.  초청인사를 위한 1800석을 제외한 400석 남짓이 일반인을 위한 자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 연주를 보기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콘서바토레 학생들은 창문너머로 연주회장을 내다 볼수 있는 담벼락에 올라앉고 연주회장의 복도와 뒤의 입석은 몸 돌릴 틈도 없이 꽉 들어찹니다. 막무가내로 자리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저지하기 위해 연주회가 시작된 이후로 경찰과의 실랑이가 그치질 않습니다. 9살 때 헤어진 조카는 이제 70이 넘은 모습으로 이 노 피아니스트를 맞이합니다. 이 조카는, 그가 모스코바에 와서 연주회하는 꿈을 늘 꿨다고 합니다.  연주회의 실황은 전 유럽으로, 미국으로 방송이 됩니다. 노 피아니스트는 어정어정 걸어나옵니다. 그리고 해맑은 미소로 청중의 환호에 답하며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흡사 청중들과 대화를 하는듯한 그의 연주에서 많은 러시아사람들은 행복해합니다.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는 곡들이 계속해서 공연 전반부를 채웁니다. 특히 조국의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와 스크리아빈의 에튜드 연주는 청중들을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후반부 앵콜연주가 시작되자 객석은 숙연해집니다. 관객들은 눈물을 훔칩니다. 객석의 어느 신사가 눈을 지그시 감은채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60여년 전에 떠났던, 여든 두살이 되어 비로소 다시 돌아온 조국, 그 조국의 무대에 선 노 피아니스트가 앵콜곡으로 치는 슈만의 `어린이 정경`의 한 곡인 `트로이메라이' (독어로 `꿈`이라는 뜻입니다.). 이날의 트로이메라이는 결코 현란한 기교, 예술성 따위를 보여주기 위한 곡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 곡은 이제 여든 둘이 되어 돌아온 노피아니스트의 혼을 매개로 삼아 세월이 앗아가버린 청중들의 동심을 한곳으로 불러왔던 건지도 모릅니다. 분명 이 노피아니스트에게도 조국 러시아에서 보낸 소년시절이 있었을 테고, 객석의 관객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테니까요.

- 1938년에 완성된 '어린이 정경'은 13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소품으로, 슈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썼던 30여 곡의 소품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트로이메라이(꿈)'는 시적이고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을 나타낸 선율이 매우 유명해서 여러 악기로도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합니다. -

이 연주를 보고 서방의 한 콘서트고어는 "It is not human, It can only come from heaven"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에는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립니다.

"Horowitz in Moscow, Bravos and Tears"

'뛰어난 연주'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는 이 모스크바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당시 세계를 양분한 냉전시대의 갈등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왜곡과 비난의 시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만이 존재합니다.  이미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몸으로, 제대로 깎지 않아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을 하고서 건반 앞에 앉아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며 어린이처럼 기뻐하던 호로비츠. 아래의 영상은, 세계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음악,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의 연주실황입니다.

슈만/ 어린이 정경 Op. 15 No. 7 '트로이메라이'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 라는 명제를 뒤집고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 와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까지 연주회에 달고 다니던 사람,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까탈스러운' 예술가. 이제부터 생의 황혼이 지는 순간까지도 '건반과 함께였던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생애를 따라가봅니다.

1904년, 호로비츠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호로비츠의 본명은 고로비츠(Gorowitz)입니다. 1925년 베를린 데뷔시에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죠.  호로비츠는 안정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가족들은 집안에 많은 고전서적들이 갖추어져 있을 정도로  지적인 사람들이었고, 이는 그가 예술가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호로비츠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세르게이 타로노프스키로부터였죠. 그의 삼촌 또한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학자였고 스크리아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그는 어린 호로비츠가 스크리아빈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해줍니다. 이 때의 인연으로 호로비츠는 평생에 걸쳐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의 사장위기에 있던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발굴해 낸 것도 호로비츠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입니다. 안톤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웠던 대 교육자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블루멘펠트에게서 사사를 했다는 것은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는 블루멘펠트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작곡에 큰 관심을 가졌고 작곡가가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아노에 관해, 특히 기술적인 면에 관해 블루멘펠트는 호로비츠에게 가르쳐 줄 것이 이미 없었다고 합니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습니다. 부유하고 문화적이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피아니스트 데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공연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으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15번의 공연을 연속적으로 열게 됩니다. 이 공연은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됩니다.

서방세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혁명 혼란기의 절정이었던 25년입니다. 첫 무대는 베를린에서였는데요, 이 세 번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듬 해 함부르크에서 공연을 갖습니다. 여기에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은 청중들을 경악케 합니다. 이 때의 협연은 본래 자신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연주에 문제가 생긴 피아니스트의 핀치히터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상당한 난곡에 속하는 차이코프스키의 1번을 대타로 나서서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명성을 쌓아가던 호로비츠는 1927년  아더 짓슨에게 발탁됩니다.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는 그를 미국에 데뷔시키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는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였다고 합니다. 현란한 기교, 폭발을 연상케하는 강렬한 터치, 애매함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러시아라는 차갑고 광활한 대륙에서 온 청년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됩니다.

 

뒤이어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됩니다.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습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날의 연주를 일러 '호로비츠는 폭풍이었다' 라고 회고할 정도로,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신선함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32년.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와 만납니다. 토스카니니는 두 사람이 협연을 할 때면 그의 음악적 고집을 호로비츠에게 강요했다고 하는데요,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던 호로비츠는 의외로 순순히 이를 따랐습니다.  33년에는,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로 성공을 거두고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합니다.  ‘토스카니니의 사위’ 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죠.

어디에서인가 보았던, 완다와 호로비츠에 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완다의 음식솜씨는 아주 형편없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식사시간이 되면 호로비츠는 음식을 조금 맛보다가 슬쩍 사라지곤 했다고 합니다. 사라진 호로비츠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답니다. 형편없는 음식에 대한 분풀이를 피아노에 했다는 것이죠. 그의 놀라운 기교는 이 분풀이용 연주에도 어김없이 발휘됩니다. 혹시, 이 때문에 호로비츠의 피아노 실력이 더 늘지 않았을는지.... 많은 이들이 크산티페의 바가지 때문에 더욱 심오한 사유가 가능했을 거라 말하는 소크라테스처럼.

 
 



글렌굴드를 이야기하자면 바흐가 나와야 하듯, 호로비츠를 이야기하자면 라흐마니노프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연주한 자신의 협주곡 3번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호로비츠가 협주곡을 통째로 먹어버렸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은 러시아적 성격을 드러내는 감미로운 센티멘털리즘과 더불어 근대 러시아 음악으로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곡가 스스로 악마적 기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던 이 피아노협주곡은 모두 4개가 있습니다. 그 중 3번은 가장 어려운 기교를 요하는 난곡 중 난곡으로 꼽힙니다. (영화 샤인 OST로 인해 알려진 곡으로 악마의 교향곡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결국엔 작곡가가 스스로 연주 녹음을 남기도록 했던 이 난해한 곡은 작곡자로 하여금 자신의 연주에까지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은 자신에게 작곡할 영감은 주었으되, 그 영감을 소리로 표현 할 능력은 주지 않았음' 을 안타까워했던 것이죠. 대단히 변화무쌍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피아노를 위한 곡이자,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수많은 악기가 오직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해 존재할 뿐인 곡입니다.  이 어려운 곡을 가지고 피아노로서 오케스트라 전체를 압도해 버리는 카리스마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호로비츠였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자신의 곡을 듣고 너무나 감동받은 나머지 그를 와락 껴안았다고 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었다지요.) 호로비츠는, 작곡자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완벽한 연주를 통해, 청중을 난해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적 본령으로 데려가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에 관한 한, '마에스트로의 연주' 라 해야 격에 맞는다는 세간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죠. 지금 흐르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op 23.제5번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실감해 볼 수가 있습니다.

 




1936년, 그는 불과 32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해버립니다. 이때부터 39년까지가 그의 첫 공백 기간입니다. 끊임없는 연주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이 시기부터 심한 피로감과 고통을 호소하며 일생을 통해 총 네 번에 걸쳐,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무려 12년 동안 침묵 기간을 갖게 되는 데요.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52년 3월 25일부터 있었던 만 12년간의 공백기입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몇몇 제자들을 만나는 일 외에는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영위합니다. 1965년 그는 12년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카네기 홀 에서 재기 공연을 갖습니다. 청중들은 여전히 그를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환영합니다. 대다수의 신문에서는 ‘헐리웃 배우의 이야기가 뒷 페이지로 밀려난’ 초유의 뉴스로 기록됩니다. 이를 기점 으로 점차 연주 횟수를 늘려 갔으며 최후의 로맨티스트로, 살아 있는 전설로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후 호로비치는 1986년 그와 음악 평생을 함께 했던 레이즐인 RCA(BMG) · 소니 클래시컬(CBS)과 결별하고 새로이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1989년 10월 25일, 호로비츠는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E장조와 쇼팽 · 리스트의 편곡 작품을 녹음하게 되는데,  마치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농축성과 성숙함으로 충만한 연주를 합니다. 그리고 11월 5일, 막바지 녹음 편집 작업을 하던 도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합니다. 스튜디오의 딱딱한 의자에서 말이죠. 이 허무한 죽음은, 비단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아닌, 유구한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종말을 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혔습니다. 

출처 : 클래식음악감상실
글쓴이 : 화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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