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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생애 10대 사건

또하심 2006. 11. 22. 11:28

 

카라얀 생애 10대 사건

- 아래의 글은 월간 객석 1999년 4월(제182 호)에서 카라얀 서거 10주년을 맞아 '카라얀을 다시 본다'라는 제하로 실렸던 글을 빌어왔습니다.


음악의 제왕 카라얀. 1989년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카라얀의 일생은 그야말로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삶이었다. 시골의 무명 지휘자에서 더이상 정복할 세계가 없는 음악의 제왕으로 군림하기까지 카라얀은 성공과 실패, 시기와 찬사, 출세를 향한 야심과 순수한 예술성의 한가운데에서 불멸의 신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카라얀의 생애 가운데 전기를 마련한 최고의 사건들을 간추려 정리해본다.

1. 1929년 1월 22일 잘츠부르크에서 지휘자로 데뷔하다


카라얀은 모차르테움 관현악단과 함께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홀에 지휘자로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환’으로 구성되었다. 21세가 될까 말까한 지휘자의 데뷔 프로그램으로서는 비교적 부담이 큰 레퍼토리들이었지만, 이러한 모험을 통해 카라얀이 거둔 효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날 밤 연주회에는 카라얀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만한 인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다름아닌 독일의 울름시립오페라극장의 지배인인 엘빈 디트리히가 청중들 가운데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카라얀의 재능을 꿰뚫어 본 디트리히는 카라얀에게 울름시립오페라극장에서의 지휘를 의뢰했다. 하지만 거기에서의 일은 대부분 오페라 지휘였다. 그때까지 한번도 오페라를 지휘해본 적이 없는 카라얀은 디트리히에게 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흔쾌히 디트리히는 그를 고용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월급 20달러를 받고 울름시립오페라극장과 전속계약을 체결, 전문 지휘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었다.

2. 1935년 아헨가극장 음악총감독에 취임하다


1934년에 ‘피델리오’를 지휘하여 처음으로 아헨의 청중들 앞에 등장한 카라얀은 이듬해 독일에서 최연소 음악총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후 카라얀의 생애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아헨의 음악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나치당에 입당해야만 했으며, 카라얀은 ‘출세를 위해 주저함없이’ 입당했다. 1961년 뉴요커지의 윈슬롭 서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일에 대해 ‘그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카라얀은 시골의 무명 지휘자에서 대도시의 평판높은 지휘자로 비약할 수 있었다. 70명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오케스트라, 뛰어난 실력을 갖춘 300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합창단, 설비가 잘 갖추어진 극장, 훌륭한 콘서트 홀을 손에 쥐고 대담하게 음악적 야심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훗날 그는 상당한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1945년 독일군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로 송환된 그는 일체의 연주활동이 금지되었으며, 195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처음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시도했을 때 미국 시민과 언론으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이 나치 이력은 카라얀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1946년 EMI사의 월터 레그와 첫 계약을 맺고 빈 필하모닉과 레코딩을 시작하다


카라얀은 종전 후 나치스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공개연주회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 해 1월에 빈 필하모닉을 한번 지휘한 것 외에는 거의 지휘를 금지당한 카라얀은 이탈리아로 물러가 거의 은퇴상태에 있었다.

그런 카라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이가 다름아닌 EMI사의 명 프로듀서 레그다. 레그는 카라얀이 전시 중에 녹음한 ‘박쥐‘를 우연히 듣고 몹시 감격해 카라얀에게 EMI사와의 계약을 주선했을뿐 아니라 카라얀의 레코딩 활동의 공식 허가를 받는 데 앞장섰다. 카라얀은 드디어 레그의 힘을 빌어 지휘 활동의 공백 상태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지휘 활동금지는 1947년 10월에 풀렸다).

이렇게 하여 카라얀의 빈 시대가 막이올랐다. 카라얀은 1949년까지 빈 필과 일련의 레코딩을 계속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8번과 9번, 슈베르트 교향곡 9번,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와 한스 호터를 솔리스트로 내세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등과 같은 위대한 유산들이 이 시기에 창조되었다.

4. 1948년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


전후 레코드 산업의 붐을 예견한 레그는 1947년에 주로 녹음을 목적으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지휘봉을 카라얀에게 맡겼다. 카라얀은 이 오케스트라의 연습에 신들린 사람처럼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레그의 의도대로 통일된 음향을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야심적인 녹음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

카라얀과 필하모니아의 파트너십은 그야말로 이상적이었다. 수적으로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모범적이었던 이들의 음반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카라얀과 필하모니아의 레코딩 중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을 꼽는다면 아마도 슈바르츠코프와의 오페라 시리즈물과 각각 기제킹과 리파티를 솔리스트로 기용한 그리그의 협주곡과 슈만의 협주곡일 것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카라얀의 폭넓은 표현력과 시적인 통찰력은 다른 레코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5. 1949년 스칼라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지휘를 시작하다


1956년에 빈 국립가극장에 받아들여질까지 카라얀의 오페라 활동의 태반은 스칼라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카라얀은 독일 오페라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지휘했다.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를 축으로 돌고 있는 독일 오페라, 이 양 세계에 정통한 지휘자는 극히 적었는데, 카라얀은 바그너 지휘로서도 뛰어난 존재였지만 베르디나 푸치니도 또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카라얀은 또한 이때부터 지휘에만 만족하지 않고 오페라 연출에도 손을 댔다. 그는 지휘자만이 오페라, 특히 바그너의 작품처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오페라의 상연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오페라들을 직접 연출했다. 조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카라얀은 무대를 어둡게 하려는 경향으로 자주 혹평을 받기도 했다.

6.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상임지휘자로 임명되다


1938년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이래 50년대 초반까지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로 베를린 필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러다 12년만인 1953년에 전후 처음으로 베를린 필를 지휘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종종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30일 푸르트벵글러가 타계하자 그는 오랜동안 학수고대하던 베를린 필에 마침내 입성했다.

향년 68세로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카라얀은 한 장의 전보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왕은 죽었다. 왕이여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카라얀의 행보를 잘 암시해주는 것으로, 이후 카라얀은 베를린 필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왕처럼 지배했다.

베를린 필은 1989년 그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사임할 때까지 30년 넘게 카라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어떤 평론가는 그런 이들의 관계에 대해 ‘카라얀은 마치 명바이올리니스트가 애기(愛器)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하듯 베를린 필을 자신의 악기처럼 다룬다’고 언급했다. 콘서트 홀과 녹음 스튜디오 혹은 유럽과 미국 등지의 연주여행 등, 카라얀이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베를린 필이 동행했으며, 이들이 등장하는 곳에선 언제나 20세기 음악의 신화가 꽃피워졌다.

7. 1957년 빈국립오페라극장 예술총감독으로 취임하다


말러와 슈트라우스, 발터, 칼 뵘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예술감독을 지낸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세계적 오페라극장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이 예술감독을 맡았을 때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명성은 높았지만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구태의연한 침체 속에 관료들의 책략과 음모가 예술활동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곳에 온 것은 스칼라극장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최고의 작품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스칼라극장에서 전형적인 독일 오페라를, 빈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빈에서 많은 오페라 공연이 역사에 남는 명연으로 기록될 수 있었는데, 특히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을 비롯한 바그너 오페라에서 그는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을 떠날 때까지 카라얀은 모두 234회, 연평균 29회의 공연을 치러냈다.

8.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창설하다


1956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4년간의 계약에 서명했다. 원래 이 페스티벌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나 카라얀은 새로운 오페라 작품들도 무대에 올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60년 새로운 대 축제극장을 완공시켜 ‘장미의 기사’로 개관 기념 공연을 했는가 하면 ‘오텔로’ ‘보리스 고두노프’ 등 매년 획기적인 오페라 상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카라얀이 잘츠부르크에서 무엇보다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작품은 다름아닌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여름 음악제에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일년 중 다른 시기에 새로운 음악제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창설했다. ‘발퀴레’로 막을 올린 이 부활제 페스티벌에서 카라얀은 ‘니벨룽겐의 반지’는 물론이거니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등을 직접 연출하고 지휘했다. 또한 연주는 모두 베를린 필이 맡음으로써 명실공히 잘츠부르크에서 최고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대규모의 오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 1980년 베를린에서 최초로 디지틀 녹음을 시도하다


소니의 사장 아키오 모리타는 카라얀에게 곧 레코드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즉 앞으로 아날로그 녹음이 디지틀 녹음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카라얀을 솔깃하게 했다. 모리타의 충고를 받아들인 카라얀은 곧 앞으로 행해지는 자신의 모든 레코딩을 디지틀로 만들 것이라고 알렸다. 그리고 1980년 봄 베를린에서 카라얀은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를 디지틀로 녹음함으로써 누구보다 먼저 디지틀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일년 뒤인 1981년 4월 15일 부활제음악제가 열리고 있는 잘츠부르크에서는 레코드 역사의 한 획을 그을만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카라얀과 소니의 아키오 모리타, 필립스의 수뇌진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CD의 최종적인 규격 발표와 데몬스트레이션이 행해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카라얀이 디지틀로 녹음한 ‘전람회의 그림’의 피날레 부분의 연주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카라얀이 CD의 발달에 깊게 관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CD 연주 시간이 대략 74분으로 결정된데는 카라얀의 의견이(그는 CD의 수록시간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을 표준으로 삼고자 했다)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써 카라얀은 CD 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10. 1989년 4월 24일 베를린 필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사임,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별세하다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선발을 둘러싼 단원들과의 충돌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밀월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84년 마침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카라얀의 재정적인 욕심까지 거론되어 둘 사이의 분쟁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1988년 4월말 베를린에서 이미 약속된 연주회를 취소하고 일본으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베를린에서는 공공연히 그의 후임자에 대한 말이 돌았다.

결국 일년 뒤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와 계약상의 이유를 들어 베를린 필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그리고 몇 달이 채 안되어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니프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날 카라얀은 7월 27일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개회 연주로 거행될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오전동안 연습을 한 뒤였다.

생전에 이미 1992년까지 자신의 생의계획을 세워놓았는가 하면 죽음 직전에도 소니의 매니저를 맞았을 정도로 유례없이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했던 카라얀이었다. 그러나 그도 자연의 진리에서는 결코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지금 아니프 마을 오르트스프리베호프 묘지에 고이 묻혀 있다.

* 글, 윤진희 기자

출처 : Easy의 고전음악방
글쓴이 : Eas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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