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1914년 5월 9일에 이탈리아 남동부에 있는 발렌타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북이탈리아 출신'인데 부유한 목재상이었던 부친의 직업 때문에 아드리아해와 인접한 이 항구도시에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으며 14세가 되었을 때 좀 더 실력 있는 선생님에게 배우게 되었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들어가 작곡을 전공하면서 비올라를 부전공으로 공부하게 된다.
18세가 되었을 때 아우구스테오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로 들어가 이 시대의 위대한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이 줄리니가 지휘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효소로 작용하게 된다.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줄리니는 이탈리아 시에나에 있는 키지아나 음악원에 들어간다.
거기서 피아노를 공부한 뒤 모교인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1944년 아우그스테오 오케스트라를 지휘 함으로서 지휘자의 자질을 인정받게 된다.
같은 해 로마 방송 관현악단을 지휘하게 되고 2년 후에는 음악감독직을 맡게 된다.
30살이 된 줄리니는 마르첼라 제 지롤라미 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 데 그녀는 기업가의 딸로서 빼어난 미모와 줄리니의 마음을 이해 해주는 여성이어서 평생 그의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50년부터 줄리니는 새로 창단된 밀라노 방송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때 수많은 오페라를 지휘하게 되는데 토스카니니는 방송으로 그의 연주를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아 자기 집에 초대하게 된다. 이때부터 1957년 토스카니니가 죽을 때까지 아주 친한 친분관계가 유지된다.
그 이후 52년부터 57년까지 밀라노 라 스칼라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지내게 된다.
이후 55년에 미국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미국에 데뷔하게 되고 58년에 로얄 코벤트 가극장에, 59년부터는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69년부터 73년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수석 객원 지휘자로, 73년부터 76년까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78년부터는 주빈 메타 후임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나 84년 사임하게 된다.
이후 어느 특정 악단에 지휘자로 있는 것 보다, 자유로이 세계각국의 도시를 돌며 연주 활동을 하였다.
지금까지 줄리니의 활동영역을 알아보았는데 음반을 살펴보면 다른 지휘자들보다 레퍼토리가 작고, 특정 작품을 2-3번씩 레코딩 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젊었을 때의 레코딩을 보면 밀라노 라 스칼라 국립가극장의 상임 지휘자로 있을 때, 마리아 칼라스와 쥬세페 디 스테파노와 같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1955년 공연한 음반이 있다.
물론 이 음반의 소장가치가 있는 이유가 마리아 칼라스의 우수 어리며 비창미가 넘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줄리니의 서정적인 연주 또한 뛰어난 음반이라고 볼 수 있다.
60년대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을 때, 많은 레코딩을 남겼는데, 최근 EMI사에서 《CARLO MARIA GIULINI PRFILE》이라는 제목으로 2장짜리를 염가반으로 발매를 했다.
예전에 또 EMI사의 판매 전략에 의해 앙코르라는 타이틀로 과거의 명연주를 염가판으로 발매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줄리니가 남겼던 음반을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6번》, 브람스 교향곡《2번》, 베토벤 교향곡《6번》, 드볼작 교향곡《9번》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9번》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보면 최근의 음반들처럼 템포가 느리지 않고 젊음의 기백과 정열이 들어 나는 참신한 연주임에는 틀림없다.
이때에 또한 오페라 지휘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는데, 모짜르트의《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의《돈 카를로》 이상 EMI사에서 발매되었고 지금도 최고의 명반으로 인정받는다.
미사곡은 베르디의 《진혼곡 미사》, 모짜르트의《진혼곡》, 베토벤의《미사》, 《장엄미사》가 EMI사에서 발매되었다.
줄리니는 70년대 후반부터 콘서트 지휘자로 돌아선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슈베르트 교향곡《4, 8, 9,번》을 드볼작 교향곡《9번》을 재녹음하고, 말러 교향곡 9번을 함께 작업을 한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3번, 5번 6번》을, 슈만 교향곡《3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6번》, 브람스 교향곡《1번, 2번》을 발매한다.
이 때에 줄리니는 콘서트 지휘자로 돌아섰지만, 간간히 오페라 음반도 발표한다.
DG사에 80년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르디의 《리골렛토》, 82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르디《팔스타프》, 84년에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녹음 한 뒤 다시는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게 된다.
84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사퇴한 뒤, 유럽으로 돌아가 유명 관현악단과 레코딩 작업을 한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브룩크너 교향곡《7, 8, 9번》을, 브람스《독일 진혼곡》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프랑크 교향곡을, 말러의《대지의 노래》 베토벤《교향곡 9번》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포레의《진혼곡》, 로시니《스테파트 마테르》를 녹음한다. 이상DG사에서 발매했다.
89년도에 자신의 레코딩 작업을 DG사에서 SONY사로 옮긴 뒤 베토벤 교향곡들을 음반화한다.
베토벤 교향곡들을 음반화하는데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내고 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모차르트 교향곡《39, 40, 41번》과《신포니아 콘체르토》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의《진혼곡》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로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드볼작교향곡《7, 8, 9번》을 그 외에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슈베르트 교향곡《9번》,《바흐 미사곡》등을 발매하였는데, 과거DG사와 EMI에서 녹음 한 것을 다시 한 번 더 선보이고 있다.
그 이후, 슈베르트 교향곡 《4,7번》과 미사곡을 녹음한 이후 은퇴한 뒤, 지금은 쉬고 있다.
줄리니의 전형적인 사운드는 '따뜻한 열기'가 그 특징이다. 현이 바탕에 깔리고 금관이 소란스러워 조화로움을 깨는 법이 결코 없는 것이다.
줄리니가 단원들에게 바라는 또 다른 주문으로는 논리와 아름다움이 있다.
즉 강력한 음악 내부의 힘에 의해서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동시에 논리적인 아름다움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작품이더라도, 또 어떻게 템포를 확장시켜나가더라도 변함없이 줄리니의 음악 안에서 존재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위대한 지휘자라면 단원들에게 마치 독재자처럼 명령하지 않더라도 오케스트라 전체의 에너지를 방출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카라얀은 틀림없는 대가이다. 그러나 줄리니는 다소 다르다.
펄만과 로스트로포비치와 같은 솔로이스트들이 그에 대해서 발견한 것은 그가 하나의 초점을 향하고 있는 음악가라는 점이다.
줄리니를 설득시키기 위한 토론을 연장시킨다 해도 그의 음악에 투입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항상 단 하나로 집약된다.
최종분석을 마친 그의 음악은 늘 강한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GIULINI는 자신이 무엇을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레퍼토리는 많지 않다. 더욱이 현재 기록된 음반 목록들을 들여다보면 약 150여 개의 타이틀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안에 수록되지 못하고 삭제된 리스트들이 상당히 많다.
우리는 그가 어떤 작품을 선보일 때, 왜 그 외의 다른 것은 안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령 말러 교향곡 1, 9번 교향곡은 하면서 2,3,4번 교향곡은 안하는가라는 식의 지적들이다.
줄리니는 그것에 대한 명쾌한 지론이 있다면, 한 작품의 악보 전체를 완전히 익히고 사랑하게 되어야만 지휘에 임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더 많은 음악들을 지휘하여 들려줄수록 우리는 더욱 더 많은 기대와 요구를 갖게 되나 보다.
1960년 무렵, 줄리니가 평소 존경하던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을 녹음하자고 EMI측에서 제의해 왔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아직은 아니라고….
우리의 세대는 물질적으로 고도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비하여 훨씬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줄리니의 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파시스트들을 피해 1943년 로마로 가기 전, 줄리니는 보스니아에 있던 이탈리아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었다. 전쟁과 그로 인한 상실감은 성년 초기에 있던 줄리니의 정신세계에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를 달래 준 것은 카톨릭의 신앙과 어린아이의 동심이었다. 동심의 세계는 그에게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삶의 지표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아내가 병석에 눕게 되자 그는 더욱 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리차드 오스본에게 말하기를 "그의 얼굴에서 아픔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통을 속으로 삭이며 음악에 헌신하던 그의 모습은 가히 감동 그 자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그는 우리가 바라는 그 이상으로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피터 디아먼드는 근래에 있었던 '미완성 교향곡'을 떠올리며 자신이 들어본 중에서 가장 정제된 음이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슈베르트가 이루지 못한 교향곡이 줄리니를 통해 완성된 것일지도...
줄리니는 신세계 교향곡을 세 번째로 녹음하면서 인터뷰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교향곡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에도 물론 가장 인기있는 교향곡 가운데 하나였지요.
이 교향곡을 오랜 세월 연주해왔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늘 말하듯 음악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 한마디 '더 나은'입니다. 이 교향곡을 지휘할 때마다 저번의 연주보다 더 좋은 연주를 해냈다는 생각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 교향곡을 거론할 때마다 이전보다 더 깊이 드볼작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쩐지 좀더 범위가 넓어졌으면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말처럼 로얄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과의 '신세계'는 줄리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심연의 깊이와 확대가 정말 인상적인 연주이다.
시카고 심포니와의 연주도 강인한 가운데 스케일이 큰 명연이었지만, 이 연주는 이전의 연주시간보다 더욱 더 유유자적한 진행과 스케일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음반은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는 동시에, 깊고 깊은 표현 속에서 건강한 노래를 가득 담아서, 섬세한 가운데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싱싱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줄리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생각들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음악이란 인간의 표현 방식중의 하나입니다. 종이 위에 악보의 형태로 존재할 때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소리로 옮아가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 마지막 악보가 끝나면 그것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지요.
그와 함께 들리는 박수와 환호성, 그것은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인 동시에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 지휘자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죠. 박수와 갈채를 집으로 끌여 들여서는 안된다고….
그것은 연주장에 그냥 남겨두어야 합니다. 또한 그 환호성이 '브라보'가 아닐지라도 고맙게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제 큰아들은 외과 의사인데요,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는 직업이라도 저처럼 찬사를 받지는 못하죠. 그러한 박수와 갈채를 좋아하는 것은 실로 인간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곳에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죠."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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