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스크랩] 20세기의 5대 명지휘자

또하심 2006. 10. 15. 22:24




얼마 전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20세기 지휘자의 카리스마가 완전히 저물었구나.” 솔직히 당시에 느낀 심정이었다. 그는 20세기를 호령하던 지휘대 위의 마지막 신화였다.카를로스는 20세기 초반을 호령했던 거장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나치에게 절망을 느끼고 1935년 독일을 떠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주한다.

그래서 카를이었던 아들의 독일식 이름이 ‘카를로스’라는 스페인 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에리히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고, 카를로스는 1950년대 취리히 공대에 유학해 아버지 몰래 지휘자 공부와 활동을 시작한다. 1954년에 데뷔했고, 아버지 에리히는 1956년에 타계했다. 이후 그는 한 발 한 발 경력을 쌓으며 어느 오케스트라, 어느 오페라 극장이든 모셔가고 싶어하는 1순위의 지휘자가 되었지만, 그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품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곳만을 찾아가 연주하는 철새 지휘자가 되었다. 철새라고는 했지만,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곳에서는 어디든 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곳에서,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곡만을, 자기 뜻대로 연주하고, 또 그마저도 음반으로 만드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어서, 그의 음반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은 주저없이 그가 평생 만나본 지휘자 중에 최고라고 했으며, 그가 만드는 음악을 들었던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클라이버는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다간 음악가로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2대에 걸쳐 ‘희대의 거장’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유일무이한 케이스로서 클래식 음악사에 기록될 것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역동적이면서도 유유자적한 지휘 모습이 담겨있는 1989년 빈 신년음악회 DVD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단원들을 이끄는 그의 모습에서 비범함을 넘어선 이 20세기 마지막 전설적 ‘신선(神仙)’ 지휘자의 명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족이지만, 카를로스 클라이버 이외에는 세르주 첼리비다케 정도가 이런 경지였다고 할만하다.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21세기에도 클래식의 대명사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카라얀. 최근까지도 카라얀의 음반은 DVD, CD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신동으로 각광받았다.

19세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니 역시 출세가 빨랐다. 그런데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신동의 어린 시절을 거친 카라얀은 자신에게 집중되던 스포트라이트가 떠나는 것을 견디?힘들었다. 결국 1933년 나치 입당의 길을 선택한 그는 1937년과 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으며 전쟁기를 맞이한다.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베를린 필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이었다.

여러 후보 가운데에 음반을 통해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일 가능성이 있는 카라얀이 단원들의 낙점을 받았고,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종신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다. 그리고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노란 딱지’로 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 포스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서 ‘음악계의 황제’의 권력을 구축한 그는 음반뿐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음악산업을 육성하며 연출에도 직접 나섰다. DVD 영상물의 기반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클래식 좀 듣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카라얀을 싫어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어쨌든 그는 최고의 악단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 중에는 함부로 ‘싸구려’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명연들이 역시 즐비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20세기 미국에서 다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너드 번스타인. 본질적으로 지휘자이지만 작곡가·피아니스트·교육가·저술가·평화운동가·동성연애자·유태주의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하버드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후 커티스 음대에서 라이너를 사사하고 1943년 25세의 나이로 뉴욕 필의 부지휘자가 된 이후 번스타인의 ‘화려한 인생’은 쉴새없이 전개된다. 발터의 급환으로 우연히 선 지휘대에서의 대성공을 기반으로 그로부터 15년만인 1958년, 뉴욕 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후 그는 TV를 적극 이용하며 상업성과 교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당시의 ‘청소년 음악회’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좀더 가깝게 접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솔티가 유럽에서 날아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이 되던 바로 그해, 번스타인은 뉴욕 필에 사의를 밝혔다. 그도 분명히 다른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럽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 10년만인 1979년, 마침내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섰다. 자신의 의도대로 음악적인 면에서도 거장성을 충분히 인정받은 번스타인은 자기보다 10년 연상인 카라얀의 죽음을 보았고, 독일 통일 기념 음악회를 지휘한 후 영면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거의 다 쏟아놓고 간 셈이다.
그처럼 유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리고 알기 쉽고 재미있게 바톤 테크닉을 구사한 지휘자는 드물다. 지휘봉 하나만으로도 그는 오케스트라가 그에게 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휘중에 엉덩이를 흔들고, 지휘대에서 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의 음악도 그렇다. 불필요한 과장이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가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들은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다. 특히 80년대의 말러 사이클은 완성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유태인이란 같은 민족으로서의 공감을 넘어 범인류적인 공감을 담은 최고의 연주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만큼 고집불통이었던 지휘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해 고집불통이지, 그는 순수주의자였다. 명예와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레코드는 코카콜라 깡통과 같은 것이고, 그런 인스턴트 깡통에 자신의 음악을 담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채 안되어 뮌헨 필, 그리고 유족들은 그의 뜻을 어기고 녹음들을 팔아치웠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 녹음들이 첼리비다케에 대한 세기적인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1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철학과 수학, 그리고 작곡과 지휘를 병행해 공부할 정도의 천재였다. 1936년 베를린에 이주해 전쟁 중에도 이곳에서 계속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독일문화와 베를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 필의 바톤을 이어 받는다. 그는 베를린 필 재건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베를린 필은 카라얀을 새 지휘자로 지명했다. 첼리비다케는 깊은 배신감으로 독일을 떠나 ‘방랑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61년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에 자리를 잡았고, 75년에 슈트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맡으며 독일로 돌아온다.

1979년 뮌헨 필의 음악감독이 된 그는 베를린에서 못다한 음악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레코딩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집불통이던 첼리비다케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1992년 베를린 필과 화해의 연주회를 했던 것은 그가 유달리 베를린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여권에는 죽기 직전까지 거주지가 베를린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그의 지휘는 기본적으로 박자를 센다기보다는 멜로디의 선을 그려나가는 구성이었으나, 생명을 어루만지는 듯한 초월적인 유기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이완과 긴장을 반복해 살아 있는 유기체의 박동, 나아가 자연의 움직임과 같은 생생한 연주를 이끌어냈다.

중세 독일의 영감적 신비주의, 템포 변환의 신비, 작품의 영적인 본체를 찾아내는 힘 등, 그는 ‘영감과 마법’으로 지휘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카리스마의 극단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가 지휘대에 서면 단원들은 물론이고 청중들까지 그의 존재에 빨려들었다.19세기 낭만주의의 맥을 이어 낭만의 진폭을 극대화시키고 주정주의와 직관을 투영한 그의 연주가 정신성에 충만해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였다.

고고학자인 아돌프 푸르트뱅글러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 게르만 혈통을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작곡을 공부했지만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뮌헨 등지에서 연습 지휘자로서 경험을 쌓았고, 1906년에 데뷔, 11년에 뤼베크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5년 만하임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인정받고 20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한 결과, 36세이던 1922년 니키쉬에게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를 물려받았다. 1925년부터 27년까지 뉴욕 필에 초빙되었고 27년부터 30년까지 빈 필 겸 빈 국립오페라극장 상임, 게다가 바이로이트 음악제의 총감독까지 석권해 명실 상부한 음악계의 ‘황제’가 되었다.

33년부터의 나치스 통치 하에 힌데미트 및 유태계 음악가들의 도피를 돕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몰려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1947년 무죄판결로 복권되어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로 돌아왔다.52년의 바이로이트 부활 연주회를 지휘했고, 같은 해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54년 죽음과 함께 ‘음악계의 제왕’의 권좌를 내놓게 된다.


글_박정준(월간 <객석> 편집장)
출처 : Easy의 고전음악방
글쓴이 : Eas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