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때문에 로마가 멸망했다고?
한겨레2011.09.09 18:21

[한겨레]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마야, 잉카, 아즈텍…. 중남미 지역에는 왜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많은 거대 건축 문명이 발달했을까? 유교라는 독특한 지배 이념이 중국과 한국에서 융성한 까닭은 뭘까? 미국 사람들이 바로 옆나라 캐나다보다 차를 4분의 1 정도밖에 마시지 않고 주로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세계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이어왔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뜻밖에도 '식물'이란 요소로 분석하면 쉽게 풀이될 수 있다.
중남미 지역의 주식은 옥수수다. 옥수수는 다른 작물보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훨씬 더 많다. 쌀이나 밀보다 식량 확보가 쉬워 노동력에 여유가 생긴다. 곡식 재배에 들이는 시간이 다른 문명권보다 적어 거대 국가사업에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래서 거대 건축 문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주식인 벼는 물로 채운 논에서 1년 내내 정성껏 키워야만 한다. 연중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해 논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인원을 조직해 체계적으로 동원하는 강력한 지도력, 그리고 그 지도력에 복속하게 하기 위해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벼농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이 차보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이유는 미국 역사만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은 식민지 아메리카에 차를 팔면서 막대한 세금을 매겼고, 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이에 반발해 보스턴 앞바다에 차를 내다버리며 독립 전쟁에 나서게 됐다. 영국의 억압을 상징하는 차는 당연히 미국에서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인간이 이룬 모든 문명과 역사의 바탕에 식물이 있다. 인간은 식물을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음식은 물론 집도, 연료도 모두 식물한테서 얻으며 살아왔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결국 식물과 공존해온 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영국의 사회사학자이자 원예 저술가인 빌 로스의 책 <식물, 역사를 뒤집다>는 인간 문명을 이끌어온 주요 식물에 대한 소개서다. 동서양 대표 식량 작물인 벼와 밀, 옥수수, 감자 같은 가장 중요한 식물부터 커피와 차, 후추 같은 기호품임에도 역사를 바꾼 식물들, 그리고 중요한 과일과 기능성 식물까지 50가지를 골랐다.
이 주요 작물들은 마치 공기와도 같은 것들이다 보니 우리는 오히려 식물이 얼마나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산다. 책은 이 쉰 가지 식물들이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왔는지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재미있는 일화들을 곁들여 소개한다.
양배추의 경우 인간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2500여년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수확량이 많아 전쟁 때면 전시 작물로 급부상한다. 이 양배추에 매혹된 이는 예상 이상으로 많은데 미국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이 있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있다. 이 양배추 마니아 황제는 달마티아 지방에서 양배추를 기르겠다며 황제 자리에서 은퇴했다. 그가 만약 양배추에 빠져 제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후 벌어진 내란이 좀더 늦어져 로마 제국이 더 오래 존속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가 만들어낸 거대한 역사적 변화들을 살펴보면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그야말로 애교스러운 수준이다. 중국 정신 문화의 동반자 구실을 해온 차는 중국의 최고 히트 수출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차 수입으로 무역 적자가 심해진 유럽이 만회책으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면서 차는 순식간에 중국을 몰락시킨 식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도 약과. 동남아시아 지역은 차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 때문에 서양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인간의 탐욕은 한 식물을 때론 약으로 때론 독으로 만들기도 한다. 삼이 대표적이다. 인간이 재배해온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인 삼은 쓸모 많기로 으뜸가는 작물임에도 대마와 마리화나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식물보다도 많은 사람을 파멸시킨 악마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은 오랜 세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대인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제초제나 비료 없이도 잘 자라고 목화보다 4배나 질긴 이 특별한 식물은 시원한 여름옷과 청바지 재료부터 주택용 절연재, 자동차 외장재까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삼이 인간과 지구를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플라스틱 제품을 대체할 천연 대용품으로는 '오래된 미래'인 삼만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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