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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명지휘자들

또하심 2008. 12. 5. 13:00

1.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1908∼1989) ‘20세기 음악의 제왕’ ‘음악의 테크노크라트’ ‘영상매체까지 지배한 마에스트로 ’ ‘20세기 최고의 상업주의 예술가’ ‘유럽의 음악장관’…. 바로 89년 7월16일 세상을 떠난 카라얀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타계하기 불과 3개월 전 34년간 몸담아 왔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37세의 카라얀은 베를린필의 종신지휘자 겸 예술감독에 임명됐다. 하지만 끝내 단원들과의 불화로 예술감독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는 한마디로 독재형 지휘자였다. 단원 선발은 물론 독주자 선정권까지 장악했다. 단원들의 불만이 뒤늦게 표면화된 것은 카라얀이 그들에게 적어도 높은 수준의 소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네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을 거쳐 빈 국립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그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토스카니니에게서 온 것 같다. 그의 성취욕 또한 대단했다. 1931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잘츠 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무려 34년간 베를린필의 사령탑으로 있으면서 베토벤·브람스·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곡을 CD는 물론 뮤직비디오로 남겼다. 그는 65년에 설립한 영화제작사 코스모텔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에도 성공했다. 촬영 각도나 자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과 횟수까지 자신이 미리 결정했다. 이 회사는 각종 음악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에 손을 댔다. ‘오셀로’, ‘나비부인’, ‘라보엠’, ‘카르멘’, ‘장미의 기사’ 등을 영화화했으나 음반과는 달리 그가 만든 영화는 재정적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 필름은 독일 유니텔 소유로 넘 어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텔레몬디알사를 설립, 레이저 디스크에 자신의 음악을 담았다. 그가 내놓은 음반은 SP·LP·CD·LD를 모두 합해 9백여종에 이른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만도 8백만장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음반은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이탈할 줄 모른다. 잘 생긴 용모와 매력으로 인해 그는 특히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언론은 ‘카라얀 병’(Karajan-krank)이라고 이를 비꼬았다. 카라얀은 이들 ‘환자’를 치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빈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힐 만큼의상에 신경썼으며 해외연주 때는 이탈리아의 단골 이발사를 항상 대동했고 틈만 나면 이탈리아 스포츠카 페라리를 신나게 몰고 다녔다. 스위스 산장에서는 스키를 타고, 남프랑스 해안 별장에서는 수상스키를 즐기기도 했다. 2.게오르그 솔티 (Sir Georg Solti·1912∼1997)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으로 리스트 음악원에서 도흐나니·바르톡·코다이를 사사, 작곡·지휘·피아노를 전공했으며 38년 부다페스트 오페라 지휘자를 거쳐 잘츠부르크 음악 제에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했다. 2차대전 후 미군 당국의 부탁을 받고 뮌헨에서 베토 벤의 ‘피델리오’를 지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으로 발탁되었고 이때부터 지휘자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그후 코벤트가든 오페라 음악감독, 시카고심포니 음악감독, 런던필하모닉 수석지휘자를 역임한 그는 2백50장이 넘는 음반을 녹음했으며 40편이 넘는 오페라 전곡 앨범, 2종의 베 토벤 교향곡 전곡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바그너의 ‘반지’전곡 음반이 유명하다. 그는 94년 ‘카네기홀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조직, 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다.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교향악단에도 정년퇴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취직난에 허덕이는 젊은 음악가들을 돕는 데 발벗고 나섰다. 명료한 연주, 박진감 넘치는 리듬,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추진력으로 몰락 일로를 걷던 코 벤트 가든을 일약 세계 굴지의 오페라하우스로 소생시켜 놓았다. 바르톡의‘오케스트라 를 위한 협주곡’, 무소르크스키의‘전람회의 그림’ 등이 명반으로 손꼽힌다. 3.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1918∼1990)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14일 오후 3시, 미국인들은 여느 화요일 오후처럼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CBS방송으로부터 뉴욕 카네기홀에서 생중계 되는 뉴욕필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25세의 부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카네기홀 무대로 걸어들어 왔다.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부터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이 끝난 후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20세기 음악 공연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3개월 전 뉴욕필의 음악감독 아서 로진스키의 조수로 임명된 신출내기 무명 지휘자가 리허설도 없이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낸 것이다. 번스타인의 역사적인 뉴욕필 데뷔는 이렇게 이뤄졌다. 원래 브루노 발터가 객원지휘를 맡기로 돼 있었으나 지병인 위염에 감기가 겹쳐 병석에 드러누웠고 뉴욕필 음악감독 로진스키도 보스턴에 내린 폭설로 발이 묶여 버렸다. 공연 전날 번스타인은 자신이 작곡한 연가곡의 초연 무대인 메조소프라노 제니 투렐의 독창회에 참석, 리셉션에서 친구들과 밤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오전 9시 번스타인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로진스키의 비서로부터 발터 대신 지휘하라는 공식 통보를 받았다. 프로그램은 무척 까다로웠다. 미클로스로사의 ‘주제와 변주와 피날레’, 40분이나 걸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 번스타인이 지휘해 본 곡은 바그너 뿐이었다. 그는 23세 때 보스턴 팝스의 야외음악회에서 작곡가 알아맞히기 콘테스트에 입상, 이 곡을 지휘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튿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각 일간지는 이날 공연을 1면에 대서특필했다. 번스타인이 평생 잊지 못할 무대였다. 그는 미국이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지휘자였다. 미국의 지휘자·작곡가. 메사추세츠주 태생으로 하버드대에서 작곡가 월터 피스턴을 사사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피아노를 전공했다. 하버드대 재학중 그는 18년 선배였던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를 만나 일생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이들은 동성애 관계로 알려져 있다. 보스턴심포니 부설 탱글우드 음악학교에서 거장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를 만나 그의 지휘 조수로 일했다. ‘고차원의 천부적 엔터테이너’‘미국의 음악적 자존심’‘클래식·재즈·뮤지컬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뮤지션’‘60년대 후반 말러 붐의 진원(震源)’…. 바로 번스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때 매카시즘 바람에 휘말려 10여년이나 미국에서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고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용, 미국인 최초로 라 스칼라에서 지휘하는 영예를 누렸다. 특히 하이든·베토벤·브람스·말러에 뛰어난 해석을 보였으며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는 ‘카니쉬 교향곡’을 작곡했다. 저서로는 “음악의 즐거움” “대답없는 질문” 등이 있다. TV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 가이드를 진행, 명성을 얻었으며 탱글우드 음악제를 본 떠 일본 삿포로에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을 창설했다. 세계평화 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89년 12월 23일 2차대전 참전국 출신으로 구성된 단원들을 이끌고 베를린필하모니홀에서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다. 4.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1927∼) 지난 91년부터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중인 그는 지난해 지휘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철학적 깊이마저 느껴지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멘델스존·니키시·푸르트벵글러·발터 등이 이끌어 오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70년 부터 지휘하면서 동독의 민주화 과정에서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 있었다. 구동독 실레시아 태생인 그는 브레슬라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전공했으며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피아노·작곡·지휘를 전공했다. 드레스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 베를린 코미셰 오퍼 음악감독을 거쳤으며 현재 이스라엘 필의 종신 명예객원 지휘자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도 겸하고 있다. 그가 미국 무대에 데뷔한 것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을 때. 74년에는 게반 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다녀갔다. 76년에는 댈러스심포니 수석 객원지휘자도 맡았다. 뉴욕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취임 후 뉴욕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이른 저녁에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선사하는 ‘러시아워 콘서트’등으로 청중 개발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고전·낭만에 이르는 독일 레퍼토리에 강하며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베토벤·브루크너· 멘델스존·차이코프스키·브람스 교향곡 전곡 레코딩 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 소스의 아리아드네’등이 있다. 5.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1933∼) 89년부터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으로 빈 음악원에서 지휘의 명교수 한스 슈바로브스키를 사사했다. 58년 쿠세비츠키 지휘 콩쿠르에 이어 63년 미트로풀로스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 27세 때 스칼라 극 장에 데뷔했으며 68년부터 86년까지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71년부터 빈필하모닉 수석지휘자, 79년부터 런던심포니 수석지휘자, 86년부터 91년까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지냈다. 토스카니니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참관한 후 지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독재형의 지휘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카라얀 사망 후 베를린필 단원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선택한 것이다. 좀처럼 미국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를 맡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다소 수줍은 무대 매너를 보이며 거창한 공식 기자회견보다 저널리스트와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면서 속 마음을 털어놓기를 좋아한다. 오케스트라의 세포를 해부하는 치밀한 분석력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보다 순간적인 음향적 효과에 관심이 많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유럽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으며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예술감독도 맡고 있다. 베토벤·브람스·말러·멘델스존·슈베르트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발표했으며 88년 ‘빈 현대음악제’를 창설하고 독일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하는 등 현대음악 초연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베를린필 예술감독 취임 후 ‘횔덜린의 시와 음악’ ‘파우스트와 음악’등 테마 콘서트 시리즈를 계속해 오고 있다. 폴리그램 프랑스사가 말러 교향곡 전곡 음반에서 느린 악장만 모은 편집음반 ‘말러 아다지오’에 대해 음반사에 소송을 제기할 정도로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자존심은 대단하다. 말러·브루크너 등 낭만주의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쇤베르크·베리오·슈톡하우젠·리게 티·펜데레츠키 등 20세기 음악에 정통하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이 명반으로 꼽힌다. 6. 오자와 세이지 (小澤征爾·Seiji Ozawa·1935∼) 오자와가 ‘장수’를 누리는 비결은 물론 그의 뛰어난 음악성 때문. 그러나 일본인들의 열성적인 후원도 작용한다. 올 봄 보스턴심포니의 극동 순회공연은 일본 NEC가 후원기업으로 나섰다. 중국 선양(瀋陽) 태생인 오자와는 일본의 명문 도호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손가락 부상 때문에 지휘로 전공을 바꾸어 59년 브장송 국제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당시 심사위원을 맡았던 샤를 뮌슈의 초청으로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공부한 그는 카라얀의 총애를 받았으며 카라얀의 제자로 레너드 번스타인의 눈에 띄어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조수로 일했다. 라비니아 페스티벌·토론토 심포니·샌프란시스코 심포니·탱글우드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73년 마이클 틸슨 토머스, 콜린 데이비스와 경합을 벌인 끝에 보스턴심포니의 제13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연미복 대신 꽃무늬 셔츠와 카우보이 부츠, 폴라 스웨터를 입고 무대에 등장하는 그의 ‘젊은 이미지’가 청중에게 어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에 조예가 깊어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과 오페라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를 초연했으며 베를리오즈·라벨 연주에 정평나 있으며 뛰어난 악보 암기력에다 화려하고도 유연한 지휘가 일품. 그러나 피상적인 해석으로 음악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 흠이다. 92년에는 일본 도호음대의 창설자인 사이토를 기리는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을 일본 마스 모토에서 시작했다. 오자와는 학창 시절 등록금이 없어 사이토의 집에서 청소부로 있었다. 94년에는 탱글우드 뮤직센터에 세이지 오자와의 이름을 딴 1천1백80석짜리 홀이 문을 열었다. 이 홀은 음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95년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 직전 오자와는 도쿄 산토리홀에서 60회 생일 기념공연을 감상했다. 단원들은 보스턴·시카고·토론토·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빈필 단원들의 연합 오케스트라였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지휘자 가즈요시 아키야마 등이 연주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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