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은 많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그리고 기악곡을 작곡하였지만 그렇게 성서적인 종교색이 짙은 작품을 위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종교적인 음악을 대중적인 극장에서 연주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헨델은 사실 역사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됩니다. 그는 궁중에서 뛰어난 연주자로도 활동을 하여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바이올린, 오보에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이러한 경험과 악기에 대한 능숙함은 작곡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헨델의 메시아(Messiah)를 들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대규모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메시아를 들으면서 한 해 동안 우리가 열심히 살았던 것에 대하여 보람을 느끼며 후회와 아쉬움을 정리하고 혹시 있었을지 모를 잘못에 대한 용서를 받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숭고한 정신과 가치는 사랑에 있으며 용서는 사랑에 대한 실체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들으며 감동을 느끼고 감성의 순수함으로 원대 복귀하여 새로운 해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아마 이러한 용서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주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를 안도하게 합니다.
헨델은 1741년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이후 많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여 발표합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작품활동과 성공으로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 받으며 안정된 삶을 런던에서 보내게 됩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보다 오페라로 명성을 얻었으며 40여 편이 넘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 받습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를 하나의 음악적 드라마라고 여길 정도로 오페라와 같은 극의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보다 규모가 작고 독창보다 합창 위주이기 때문에 성악의 개인적 의존보다 부담도 적고 제작비도 크지 않아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용이하였습니다. 비록 메시아가 종교적인 이유로 런던의 극장에서 공연되는 것이 거부되었기는 하였지만 메시아의 성공은 이후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메시아는 전부 3부로 구성된 곡이며 1742년 4월 23일 영국의 더블린에서 초연 되었습니다. 제 1부는 예언과 탄생, 제 2부는 예수의 수난과 속죄 그리고 제 3부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제로 총 52곡이 들어 있습니다. 메시아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깊이를 더 해주는 감동 있는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며 특히 크리스마스에 이 곡은 거의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헨델은 그로부터 9년 후 오라토리오 '입다'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게 됩니다. 실명한 후에도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개정하는데 혼신을 기울이다 영국인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게 됩니다. 원래 독일에서 태어난 헨델은 1926년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인으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헨델이 태어난 곳은 독일의 할레입니다. 아버지는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목사의 딸로 신앙이 두터웠고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태어난 바흐와 곧잘 비교되는데 음악적 환경에 자라난 바흐와는 달리 헨델은 아무런 음악적 재능을 물려 받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있어 소년 시절부터 이미 뛰어남을 보였습니다.
아홉 살 때부터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하였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전공되었지만 결국 18세 때 오페라 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불과 스무살의 나이로 오페라 '알리마'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면서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후 유럽의 각국을 여행하면서 작품과 연주활동을 병행하던 중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게 되고 깊은 감동을 얻은 헨델은 그 후 아예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헨델은 많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그리고 기악곡을 작곡하였지만 그렇게 성서적인 종교색이 짙은 작품을 위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종교적인 음악을 대중적인 극장에서 연주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헨델은 사실 역사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됩니다. 그는 궁중에서 뛰어난 연주자로도 활동을 하여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바이올린, 오보에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이러한 경험과 악기에 대한 능숙함은 작곡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헨델은 많은 기악곡도 남겼는데 오늘날에도 많이 연주되는 곡들입니다.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등은 대표적인 그의 관현악곡들입니다. 오르간 협주곡도 많이 작곡하였는데 주로 오라토리오의 공연 중 막 사이에 공연되었으며 때로는 즉흥적으로 연주하라는 표시를 하여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기법도 사용하였습니다.
메시아(messiah)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메시아는 하나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주로 붙여서 사용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구세주에 대한 기대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많이 나타나지만 로마 시대 후 종말론적인 의미로 퇴색되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히 의미하는 것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왕이라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헨델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오라토리오(oratorius)는 라틴어로 기도하는 사람에 속하는 것이나 장소를 의미한다고 하며 독창곡이나 합창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종교적인 가극을 의미합니다. 헨델이 이 곡을 작곡하던 무렵은 음악의 바로크 시대에 해당하며 바하와 함께 대표적인 바로크 작곡가로 일컫습니다. 바하가 음악의 아버지라면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두 사람은 같은 해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같은 해 독일과 영국에서 각각 세상을 떠나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헨델이 메시아를 초연하였을 때 참석한 영국의 왕이 '할렐루야' 합창 부분에서 너무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감상을 하자 신하들과 모든 참석한 관객들이 따라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헨델의 메시아가 연주될 때 바로 이 부분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를 감상한다고 합니다.
2시간 30분 동안 길게 연주되는 메시아를 들으면 누구라도 예수 탄생의 경이로움과 거룩함에 감동과 전율을 느끼고 음악에 매료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듣는 메시아의 합창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온 세상의 때와 죄악이 깨끗이 씻어지는 용서와 화해의 장이 펼쳐지게 하는 음악의 힘입니다.
글 : 유현철 객원기자(월시스, 사랑의교회 집사)
2006.12.
헨델은 자신이 세속 오페라의 거장으로 성공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지금 성서적 오라토리오의 대표적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메시아’는 ‘기독교 음악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다. 헨델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열정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붙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성공과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가려던 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빛을 보게 되고, 성공을 수반한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다.
헨델(G.F.H?ndel)의 생애를 통해서도 이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크 음악의 두 거장 바하와 헨델은 독일에서 1685년 같은 해에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났으나,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바하는 독일을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 교회음악 작곡에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헨델은 이탈리아를 거쳐 결국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오페라의 세속적인 성공에 집착했었다. 1710년 영국으로 건너간 헨델은 영국인들의 열렬한 지지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오페라를 작곡했고, 왕립 음악원을 세우는 등 이탈리아 오페라의 부흥을 위해 그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런데 10여년 동안 인기를 누렸던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새로운 음악양식에 갈급해 있던 영국인들에게 '거지 오페라'의 등장으로 그들의 관심이 옮겨 가서 영국인들의 인기를 점점 잃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오페라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10여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공연했으나, 연주회 마다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늘어나는 빚으로 경제적 파탄에 이르게 되고, 실추된 음악가적 명성으로 인해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질병까지 얻게 되어 건강도 악화 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헨델은 더블린의 필하모니아협회로부터 자선공연을 위한 신작 의뢰를 받고 작곡을 했는데, 그 곡이 가장 감동스러운 음악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174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완성된 걸작인데, 헨델은 24일 동안 침식을 거의 잊은 채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열정적으로 혼신을 다해 '메시아'를 작곡했다고 한다. 그가 성령이 주시는 영감으로 쉴새 없이 써내려 갔음을 이 곡의 원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악보 원본에는 여기저기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고, 급히 써 내려간 음표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한다. 9월 6일 헨델은 44번 '할렐루야'를 작곡한 후 '나는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분을 뵈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의 인생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메시아(구세주)를 만났고, 메시아를 통해 그의 좌절과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며, 그가 만난 메시아를 전하고 찬양하려는 참을 수 없는 열정을 오라토리오 '메시아' 속에 쏟아 부은 것이다.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가사는 완전히 성경에서 그대로 인용된 것이다.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탄생, 2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3부는 부활과 영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한 기독교 교리의 집대성이며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초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자선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런던 연주에서는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 국왕 조지 2세가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자 청중이 모두 일어섰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이후 이것이 관습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750년 이후 헨델은 이 작품을 매년 자선을 목적으로 공연했고, 시력을 거의 잃어 가고 있던 1759년 사순절 기간에 코벤트 가든에서 연주된 '메시아'를 마지막으로 듣고, 4월 14일 부활절 전날 숨을 거두어 웨스터민스터 예배당에 묻혔다.
글 : 지혜련(성신여대 음악대학 강사, 사랑의교회 집사)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영국인이여! 규칙을 지키자!’(Rule, Britannia!)라는 노래가 토마스 아르느(Thomas Arne)의 마스크의 주제 음악으로 사랑받았다. 나중에 이 주제는 헨델, 베토벤, 바그너가 이용하였다. 되풀이되지만 마스크는 영국의 궁정에서 유행했던 공연 형태로 대화체와 노래가 복합된 오페라였다. 마스크라는 용어는 관객들이 마스크를 쓰고 오페라 공연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헨델의 등장으로 런던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는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의 원장이 되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보급에 열중하였다. 헨델 전성시대였다. 무엇이든지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한다. 어느 때부터인지 헨델의 오페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왜 그런지 사람들, 특히 그를 후원하던 왕족들과 귀족들이 헨델을 찾지 않게 되었다. 헨델은 판촉을 위해 오페라에 코미디 요소를 첨가해 보기로 했다. 오페라 포로(Poro: 1731)는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했지만 다음해에 내놓은 에지오(Ezio)는 재난이었다. 그 다음에 내놓은 소사르메(Sosarme)는 극장장이 관중들을 생각해서 레시타티브를 삭제하도록 강요할 정도였다. 런던 사람들은 보고나면 허무한 코미디보다는 기억에 남을 기막힌 아리아를 원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그런 추세로 가고 있었다. 헨델은 그런 스타일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연속해서 몇편 선보였다. 올란도(Orland), 크레타의 아리안나(Arianna in Creta), 세르세(Serse: Xerxes), 이모네오(Imoneo)등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찾아와 주지 않았다.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변덕이 심한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보통생활과는 관계없는 신들의 작태에 싫증을 느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똑같이 들리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헨델 음악에 돈내기가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 때에 헨델의 오페라단에 경쟁자가 나타났다. 대영제국의 황태자(Prince of Wales)가 지원하는 ‘귀족 오페라단’이었다. 헨델과 비슷한 내용의 오페라이면서도 자기들이 후원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귀족들은 그쪽 공연으로 몰려갔다. 헨델의 오케스트라는 해단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작심한 헨델은 대신 오라토리오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영국 특유의 오라토리오가 탄생하는 계기였다. 메시아(The Messiah)가 대표적이었다. 화려하고 독창적이었다. 제임스국왕이 메시아를 관람하였을 때 할렐루야 합창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일화는 오늘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로부터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할렐루야가 불러질 때에는 모두들 기립하여 경의를 표하는 전통이 생겼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즈음에 존 게이(John Gay)의 스토리를 기본으로한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등장했다.
발라드 오페라의 개막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발라드 오페라의 특징은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아는 대중 노래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라드 오페라의 내용은 도덕적인 것이었다. 근친상간이나 무자비한 보복이 판치는 신화적 내용에 비하면 매우 건전한 내용이었다. 발라드 오페라는 런던의 오페라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거지들의 오페라'를 쓴 존 게이
존 게이가 대본을 쓰고 독일 출신인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슈가 음악을 붙인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는 런던의 오페라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거지 오페라’는 당시 영국의 오페라 시장을 주름잡았던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와는 달리 내용이 알기 쉽고 도덕적인 메시지가 있으며(그리스 신화의 내용들은 도무지 도덕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음악은 민속적인 멜로디로서 단순하고 친숙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였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존 게이와 요한 페푸슈 합작의 ‘거지 오페라’는 계속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거지 오페라’ 후속편인 두 번째 오페라 콜리(Polly)는 당시 영국수상이던 로버트 월포울(Robert Walpole)에 대한 에피소드를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다. ‘거지 오페라’는 발라드 오페라의 대표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