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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몰랐던 "전쟁영웅"

또하심 2006. 9. 10. 15:56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중령

25일 MBC 스페셜이 ‘영웅, 김영욱 대령’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의 삶을 재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2000년 노근리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미군이 양민학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며 미군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대 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봉사 단체들을 만들어 후원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 냈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에 대해 한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며 “김영옥 대령의 삶과 업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2차 대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인 부대원들과 미국 내 백인주류사회 등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다. 그의 방은 꾸며지지 않았고 벽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김 씨가 두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란 사실. 그는 다시 재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방송은 밝혔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영옥 씨의 삶에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디가 ‘WHBEAN`이란 시청자는 “그 분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김영옥 대령의 고귀한 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이디가 ’JS4019`인 시청자는 “전쟁영웅이면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완고함과 편협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김영옥 대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고귀한 양심, 이타적 리더쉽 등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는 행적으로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가 걸어온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는 김영옥 씨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미국 사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무공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출처 : 시인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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