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여행가가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여행기를 읽었었다.
영국 명문가의 여식...무엇보다도 그녀의 사촌이 노예페지법을 관철한 그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목사
윌리엄 윌벼포스!!!!
영국의 노예제도와 사회 곳곳의 부패를 개혁했던 하나님의 정치인 윌리암 윌버포스는 1759년에 영국 Kingston-upon-Hull에서 사회적 명성이 있는, 부유한 요크셔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을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Manners)을 개혁하는 것이다."
라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탁월한 정치인인 윌버포스는 이 비전과 사명이 당시 영국 사회에 가져 올 엄청난 파문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 존 뉴톤은 그의 정치생활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도록 설득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엘리트의 도덕을 개혁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상류층을 향해 그들의 신앙생활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말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북미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노예무역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영국, 스페인등이 식민지에 공급한 노예가 3백만명 이라 하니 그 규모를 과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노예무역은 연간 수 만명의 고용을 창출하여 식민지산업의 기둥이어서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뿐 아니라, 해군력 증강 등 국가안보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798년에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을 폐지하자고 과감히 캠페인을 벌렸다. 체구가 왜소한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결렬한 대의회 논쟁을 통해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영국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윌버포스는 "Clapham Sect"의 회원들과 함께 열심으로 다해 18년간 노예 무역을 폐지하도록 노력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하원은 그에게 유례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무역금지법'(The Slavery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다. 그의 굳건한 의지와 분명한 신념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아예 인류 최대의 악습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
오늘날 미국의 방위산업같이 당시 대영제국의 노예 매매제도는 거대한 제국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윌버포스는 해군제독 넬슨경 같은 식민지 기득권을 가진 세력, 권력을 가진 왕족, 그리고 막강한 돈을 가진 상인들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기도, 중상모략, 악의에 찬 비방, 협박편지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와 노래 등 문화적 접근, 사진판매 및 탄원서 제출,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된 설탕불매운동 등 다양한 방식의 대중여론 형성과 하원의원으로서의 입법 활동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나갔다. 초지일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나가, 영국의 수 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 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워 그의 중요한 공적 경력을 모두 외롭고 기나긴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다
.증조부인 죠지 머티스경이 런던시장을 지냈고 조부 로버트 버드는 인도와 미국에서 큰돈을 번후 벼크셔에 귀족신분의 농부로 정착, 그녀의 父는 그들 열명의 자녀들중 하나였고 결혼하지않은 아버지의 여자형제들은 설탕산업에 부리는 노예제도를 반대하여 차에 설탕 넣는것을 거부할만큼 개념?집안의 장녀렸다고
대영제국의 위력이 만만했던 빅토리아여와시절로 나이팅게일과도 동시대 여걸이고
나이팅게일 왈
여성은 스스로를 전혀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정규적인 직업, 즉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말고,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정말로 하고 싶었다.
당시 19세기 중엽에는 결혼적령기의 교육받은 남자들이 방대한 영국령 식민지에 파견되거나 전쟁에서 죽거나(당시 터키에서 크림전쟁) 열병등으로 죽어서 적령기의 양가규수들이 넘쳐났다고함
이사벨라도
항상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남을 도와야한다는 가르침을 교육받았고, 양가의 규수가 아버지나 남편의 지원을 받지않고 스스로 돈을 버는것응 매우 부적절하다는 사회적인 통념이 지배하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