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히틀러
19세기 초반까지 독일은 수백 개 연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통일 국가의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유럽의 주도권을 지닌 국가가 아니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면서 형성된 독일의 국가주의는 심화되어 결국 나치 시대의 극단적인 민족 우월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치 정권은 기본적으로 선거에 의해 독일 국민이 선택한 정권이고 독일 국민은 나치가 가져다 준 경제적 풍요를 마음껏 누렸다. 한편으로 나치는 언론을 장악하고 감시와 통제로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탄압했다.
'1935~1937년 사이에 나치가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시대'(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무시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 히틀러는 아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두 가지 목표를 이루었다.
600만 명에 달했던 실업자들이 1937년을 기준으로 모두 일을 하고 있었고, 독일은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강대국이 되었다. 거대한 인프라 건설로 항구와 도로를 재정비함으로써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노동자 가족이 돈을 벌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호사를 가져다 주었다. 모든 가정에서 가정용 라디오를 보유했고, 최초의 폭스바겐 자동차가 공장을 떠났다. 1936년에 있었던 올림픽 기간 동안, 제국 우체국은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시도했다. 나치 조직인 '즐거움을 통한 힘'이 저렴한 단체 관광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공장 노동자도 뮌센으로의 주말 여행이나 가르다 호수로의 기차 여행, 마테이라 섬을 왕복하는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신뢰도를 나타내는 가장 믿을 만한 매개 변수인 출산율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지 1년 만에 거의 25% 가량 증가했다.
1933년에 열린 선거에서 자유당, 사회민주당, 기독교 연합, 공산당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이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심지어 강제 수용소마저 특정 측면에서 많은 독일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예컨대 '반사회적인 인물'이나 '기생충 같은 사람', '범죄자', '건달', '외국인 부류' 등이 마침내 길거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문 기사, 팸플릿, 공개 간담회, 영화를 통해 '인종적 순수성의 회복'이 강조되었다. 1939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심신장애자 안락사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전국적으로 6곳에 가스 살포를 위한 시설이 들어섰다. 7만 여명의 정신 질환자 중에서 다섯 명중에 한 명 꼴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유럽사 산책 (헤이르트 마크 지음, 강주헌 옮김) p 439~432 참조.
으음....합리적이라는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한때 열광했던 이유가 있었구나......